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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하느님의 종 이기주 바오로의 눈으로 본 병인년 박해 이야기
링크 http://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74751¶ms=page%3D1%26acid%3D366

병인박해의 시작. 1866년 2월 23일 성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고 ‘포고령’이 내려졌다. 이후 몇 달, 몇 년을 이어간 박해로 당시 2만3000여 명의 신자 중 거의 절반에 육박하는 1만여 명이 순교했다. 전국 곳곳에서 순교자들의 피가 넘쳐흘렀다. 특히 서울의 절두산순교성지는 명실상부 병인박해의 대표적 순교지로 꼽힌다. 이번 호에서는 병인박해의 전개 상황을 절두산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이기주(바오로, 1839~1866)의 시선으로 돌아본다.


“베르뇌 주교님께서 돌아가시다니? 이런 날벼락이 있나?”

주교님께서 체포되시다니, 순교하시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청천벽력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인들 사이에 프랑스 주교님들의 방아책으로 곧 신앙의 자유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베르뇌 주교님만이 아니었다. 정의배 회장님도 순교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 회장님은 부모님을 잃고 여기저기 떠돌던 나를 거두어주고 천주교 교리를 가르쳐주신 은인이다. 정 회장님은 기해년에 앵베르 주교님과 모방·샤스탕 신부님의 순교 장면에 감화돼 입교했다고 하셨다. 나는 그분들이 순교하던 기해년(1839년)에 태어나서인지, 정 회장님께도 남달리 정이 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충격으로 말문도 열리지 않을 지경이다. 우선 한양 인근에 몸을 숨겨 박해 동향을 살폈다.

■ 전국에 퍼진 박해의 광풍

포고령 이후 좌·우포도청은 천주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두기 시작했다. 2월 25일에는 정의배 회장님이, 26일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님이 잡혔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튿날에는 볼리외 신부님과 도리 신부님이 체포됐다. 밀고자가 있었다. 이선이 등의 밀고자 때문에 프랑스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같은 신자로서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조정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심문하면서 배교를 강요했다. 선교사들이 원하면 외국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선처를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우리의 장한 선교사들은, 조선 백성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들어왔기 때문에 되돌아가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조정은 교인들을 역모죄로 몰아 바로 참형 판결을 내렸다.

“천주님은 만민을 모두 평등하게 사랑하시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이러한 당연한 이치를 가르치는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어찌 역모란 말인가?”
나는 한탄했다.

조정은 교인들의 처형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베르뇌 주교님과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님 등 4명은 3월 7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남종삼 승지는 3월 7일, 전장운과 최형은 3월 9일 서소문 밖 사형터에서 같은 형을 받았다. 교회 지도자였던 정 회장님과 우세영은 3월 11일 새남터에서 참수됐다. 나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의 참수 현장을 차마 지켜보지 못했다. 형장 주변에 밀고자들이 있을까봐 두렵기도 했다.

3월 30일에는 다블뤼 주교님과 오메르트·위앵 신부님, 황석두·장주기 회장까지 갈매못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들은 한양에서 국문을 받았지만, 형은 충남 보령에서 받았다. 고종의 국혼을 앞두고 한양에서 양인의 피를 흘릴 수 없다는 중신들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순교한 날은 마침 성 금요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리델 신부님은 다행히도 박해의 광풍을 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리델 신부님은 포고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도를 떠나 충청도 공주 지역 버시니 마을 등지에서 피신하다가 페롱 신부님을 만났다. 문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칼레 신부님도 충청도 진천 삼박골, 목천 소학골 등지로 피신하다 리델·페롱 신부님과 합류했다고 한다. 리델 신부님은 페롱 신부님의 지시에 따라 7월 1일 가까스로 중국으로 탈출했다. 페롱·칼레 신부님은 조선에 남아 교인들을 돌보려고 했지만, 10월 박해가 심해지자 결국 중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 병인양요와 박해의 확대

가까스로 탈출한 3명의 선교사를 제외하고 조선에 있던 12명의 프랑스 주교님과 신부님 중 9명을 비롯해 교회의 주요 지도자들이 박해로 처참하게 돌아가셨다. 한 차례 휘몰던 박해의 광풍은 이렇게 멈추는 것 같았다. 숨어 지내면서 살아남은 교인들은 잠시나마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련의 외국 선박이 조선 해안을 침범해오자 위협을 느낀 조정은 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더욱 확대하기 시작했다.

4월과 8월에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을 시도했던 일이 있었다. 특히 오페르트는 두 번째로 들어왔을 때, 아산만 상륙이 좌절되자 강화도까지 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

6월에는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 호가 평안도 해안에 접근했고, 9월 2일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감사 박규수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불타게 된 일이 있었다.

세 번째 사건은 바로 프랑스 함대가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범한 병인양요였다.

프랑스 함대는 조선 해안을 위협했고, 군인들은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바로 중국으로 탈출한 리델 신부님이 조선의 박해 소식을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에게 알렸기 때문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소식을 들은 로즈 사령관은 보복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조선 원정을 위해 9월 18일 리델 신부님과 조선 신자들의 안내를 받아 세 척의 군함을 출항시켰다. 프랑스 군함은 9월 26일에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진과 서강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도성의 사람들은 거대하고 빠르게 움직였던 서양의 군함을 보고 놀라 모두들 몸을 피했다. 조정은 서양 세력에 대한 깊은 적대감과 위기의식을 느끼게 됐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병인양요였다.

한강까지 올라와 정탐을 했던 프랑스 함대는 10월 11일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로즈 사령관이 군함 일곱 척을 이끌고 왔다. 10월 14일에는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했고, 이튿날에는 강화읍을 점령했다. 바로 제2차 병인양요였다. 프랑스 병사들은 강화도에 있던 은괴와 많은 서적·물품들을 약탈했다. 로즈 사령관은 선교사를 처벌한 사람들을 문책하고 통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조정에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조선군은 10월 26일과 11월 9일에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벌인 싸움에서 프랑스 군에게 승리했다. 이후 프랑스 군대는 동절기로 인한 항해의 어려움 때문에 퇴각했다. 이들은 11월 21일 외규장각 문서와 보물들을 약탈한 뒤 중국, 당시 청나라로 철수했다.

■ 양화진의 새 사형터로 끌려가

병인양요가 프랑스 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조정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강화했다. 대원군은 그동안 두려워했던 서양세력 격퇴에 자신감이 생긴 듯이 보였다. 이후 박해는 한양뿐 아니라 전국 각지로 확대됐다. 특히 10월에는 한양을 비롯해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의 감영이나 진영이 있는 곳에서 많은 교인들이 처형됐다. 지방의 관아는 잡아들인 교인들을 한양으로 압송하지 않고 곧바로 죽였다. 조정이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참수를 하고 후에 보고하라는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각 관아의 포졸들은 배교자를 앞세워 각처의 교우촌을 약탈하거나 유린했다는 소식이 계속 들어왔다.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을 침략세력과 내통하는 통외분자(通外分者)로 몰았다. 리델 신부님과 조선의 교인들이 프랑스 함대의 안내자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천주교에 대한 조정의 적대감이 더욱 커진 것처럼 보였다. 대원군은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우리의 강물이 서양의 배로 더럽혀졌다. 그들의 피로 이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는 내용의 방을 전국 방방곡곡에 붙였다. 서양 오랑캐 즉 양이(洋夷)의 피로 물든 국토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씻어내라는 명령이었다. 이후 대원군은 프랑스 정찰함대가 다다랐던 양화진 나루터 부근에 새로운 사형터를 세우고 교인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10월 23일부터 이의송(프란치스코)·이붕익(베드로)·이의송의 처 김이쁜(마리아) 일가와 감한여(베드로)·최경원(야고보) 등이 양화진 나루터에서 처형됐다.

천주교인 수색을 강화하던 포졸들이 결국 내가 숨어있던 곳까지 찾아냈다.

‘한양의 그 많은 민가 중에 어떻게 이곳을 알게 됐을까?’ ‘누가 나를 밀고한 것일까?’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은 나를 오라로 묶고 포도청으로 데려갔다. 포졸들은 몽둥이로 때리고 주리를 틀면서 나에게 배교를 강요했다. 하지만 나는 천주를 배신할 수 없었다. 15년 전 정의배 회장님이 나에게 교리를 가르쳐주던 때가 떠올랐다. 이후 15년은 진심으로 행복한 삶이었다. 나는 형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15년 동안 믿어왔기 때문에, 죽더라도 배교할 수 없다.”

결국 나도 참형 선고를 받았다. 이어 11월 16일 강명흠(베드로)·황기원(안드레아)·김진의 처 김큰아기(마리아) 등과 함께 양화진의 새 사형터로 끌려갔다. 내 나이 고작 28세였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

- 출처 가톨릭 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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