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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곳 완주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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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2박4일> <제주도> 환상의 섬 제주로 떠나는 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순례의 기도 속으로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상품특전-국내 최대 크루즈 씨월드 고속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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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현지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숙박 룸메이트는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출발 인원이 성원 되지 않을 경우 1주일 전 취소가 진행되며 100% 환불해 드립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숙박비 및 일정표내 식사 ► 크루즈 3등실 및 항공 교통비 ► 리조트조식2회, 회정식, 갈치조림 정식 등 특식 4회 포함 9식 ► 숙박 금호리조트 27평형 스위트룸 4-6인실 ► 체험비 및 입장료 일체 ► 전문 성지순례 가이드 ► 제주도 육상 버스 임대비 및 기사수고비 포함(참가 인원에 맞추어 전담 차량이 제공됩니다.)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불포함사항►음료 및 주류, 물, 각종 간식 ►미사 봉헌시 성당 봉헌금/ 예물비 ►객실 싱글 비용( 싱글 사용 희망시 전일 8만원 추가 됩니다.) ►포함 외 식사 및 입장료 ►공항간 버스비용 ►추가 개별 관광 비용 ►수하물은 15KG만 무료 이며 초과될 경우 비용이 추가 됩니다. ►항공 여정변경 희망시 변동 수수료( 현 비용은 비성수기 기준 금액으로 성수기 시즌엔 비용이 변동됩니다.) 쇼핑센터※ 노쇼핑 노옵션 ※ 문의 비안네 성지순례 (주)점프투어리즘 여행사 ◆ 현 일정은 기후 변화나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동될 수 있습니다. 일정표중앙성당 제주중앙성당은 제주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1899년 4월 22일에 설립되었다. 수원 갓등이 본당(현 왕림 본당)에 재임하던 배 카를로(C. Peynet) 신부와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새 신부가 제주에 임명되어 5월 26일 제주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6월 14일 당시 제주읍 한짓골, 즉 대로동(大路洞)[현 제주시 삼도2동 108번지]에 거처를 마련하고 전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0년 5월에 배 카를로 신부가 전라도로 전임되었다. 구 마르첼리노(M. 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6월 12일에는 보좌 김원영 신부가 정의군으로 가서 ‘한논(大沓) 본당(현 서귀포시 호근동)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제주 본당의 첫 번째 자본당이었다. 1911년 4월 8일 대구교구가 설정될 당시 제주 지역의 총 신자수는 모두 4백 여 명이었고, 예비 신자수는 1,500여 명, 신성여학교 학생 수는 60명이었다. 1937년 4월 13일 광주교구가 설정되면서 본당은 그 소속 본당이 되었다.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본당은 총독부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1년 10월에는 본당의 손 파트리치오 신부와 서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서귀포 본당의 나 토마스(T. D. Ryan 羅) 신부 및 몇몇 신자들과 같이 일제 총독부에 의해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광주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성당은 일본군의 야전 병원으로, 부속 건물은 장교 숙소로 징발되었다. 본당 신자들은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목포 산정동 본당에 재임(1943~1944년)하던 박문규(朴文奎)(미카엘) 신부가 가끔 제주를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박문교 신부는 1944년 여름부터 제주 본당의 임시 주임으로 임명되어 1945년 5월까지 제주에 거처하면서 신자들을 돌보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제주에 투옥되어 있던 손 파트리치오 신부와 서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석방되었고, 빼앗겼던 성당과 건물도 되찾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은 제주 본당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성당은 피난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8월에 증축하였다. 다음 해 2월에는 서울의 소신학교(성신중학교)와 대신학교가 본당 구내에 있는 신성여자중학교 교실을 이용하여 피난 학교를 개교하였다가 5월에 부산으로 떠났다. 또한 전쟁 기간 중 신창 본당과 한림 본당 등이 생겼고, 레지오 마리에 운동이 도입되었다. 제주 본당은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성장하였으며, 이는 곧 제주 지역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교세의 증가와 지역 개발은 본당의 분할로 이어져 1967년 세 번째 자본당인 동문 본당이 분리되었고 본당의 이름이 제주 중앙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1971년 6월 28일(국내 발표 7월 14일) 제주 감목 구는 교세가 확장되어 ‘제주 지목구’로 설정되었고, 하롤드 대주교가 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결과 제주 중앙 본당은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1977년 3월 21일(국내 발표 4월 23일) 제주 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고 초대 교구장에 박정일(미카엘) 신부가 착좌하였다. 같은 해 6월 30일에는 다섯 번째 자본당인 서문 본당이 분리 신설되었다. 그리고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주교좌 대성당이 1997년 기공식을 갖고 2000년도에 봉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덕정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공식적인 박해 정책은 막을 내렸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던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빈발해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즉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에 의한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입니다. 신축교안은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는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습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습니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했습니다. 용수성지, 김대건 신부님 표착 기념성당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입니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제물포항을 떠나 상해로 갔습니다. 8월 17일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에 올랐습니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여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한 후 다시 항해를 시작해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라파엘호를 복원하여 해상성지순례를 마치고 9월 19일 용수리 포구를 성지로 선포했습니다. 항해를 마친 라파엘호는 신창 성당 마당으로 옮겨 보존하다가 2006년 11월 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도 표착과 제주도에서 한국인 첫 사제의 첫 미사가 거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앞 잔디광장으로 옮겼습니다. 2008년 9월에는 기념관 바로 옆에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을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2017년 10월에는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을 리모델링하고 사제관을 신축해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남원성당 남원 지역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1956년으로, 그 해 남원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오갑순[요안나]이 어린이들을 모아 자발적으로 교리를 가르치면서였다. 그때부터 오교사는 예비신자 어린이들과 함께 학교 교실과 야외 등지에서 공동체 모임을 갖는 한편, 주일마다 수십 리 떨어져 있는 서귀포 성당까지 걸어가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이 사실을 서귀포 본당의 제13대 주임으로 재임하던 모 로베르토[R. Brady] 신부가 알게 되었으며, 그는 1956년 8월 ‘남원 공소’의 첫 미사를 남원초등학교에서 집전하였다. 오갑순 교사가 전입되자, 서귀포 본당의 염 요한[J. Roche] 신부는 1960년에 강봉주[아우구스티노]를 초대 유급 전교사로 임명하여 남원 공소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1968년 이래 약 3년 동안은 전교 회장이 파견되지 않다가 제17대 김병준[요한] 신부가 송기홍[토마스] 회장을 다시 남원 공소에 파견하였으며, 1972년 4월 9일 신자들과 협의하여 평신도 사도회를 조직하였다. 1971년 제주지목구[제주교구]가 설정된 다음해에는 지목구장 현 하롤드[H. Henry] 대주교가 김병준 신부와 함께 남원 공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976년 이래 약 6년 동안 공소는 다시 전교 회장 부재 시기를 겪게 되었다. 그러나 청년회를 중심으로 전교에 노력하여 신자수가 100명 이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1982년 1월 5일 정광진[요한]이 새 전교 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신자수의 증가에 따라 1977년 서귀포 성당의 매 데스몬드[D. Maguire] 신부는 남원리 1253-5번지 일대의 부지를 매각한 뒤 신축공사에 착수하였고, 같은 해 7월 31일 교구장 박정일 주교의 집전으로 새 공소 건물 낙성식을 가졌다. 1980년대에 들어 공소의 신자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이어 1988년 2월 10일 서귀포 본당의 효돈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남원 공소는 새 본당에 속하게 되었으며, 1990년 1월 31일에는 부속 건물을 수녀원으로 개축하고 2월 10일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의 수녀를 초청하여 공소 분원을 설립하였다. 또 1991년 1월 26일에는 공소 출신 이시우[안드레아] 신부의 서품식이 있었다. 이처럼 공소의 성장 모습이 뚜렷해지게 되면서 교구에서는 1997년 2월 5일자로 남원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면서 강형민[다니엘]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새미은총의 동산 ‘삼뫼소’(묵주기도 호수)는 세 개의 오름(봉우리)으로 둘러싸인 못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찾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제주교구 사제들의 뜻에 따라 성 이시돌 목장을 세운 임피제 신부가 1992년부터 목장 뒤를 순례지로 본격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이 삼뫼소를 ‘은총의 동산’으로 명명하고 교구의 대표적인 순례지로 지정했습니다. 2009년 제주교구는 ‘삼뫼소’란 명칭을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변경했습니다. 새미는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12개의 주요 사건을 표현한 ‘예수님 생애공원’과 삼위일체 대성당이 있습니다. 아일랜드식 켈틱 십자가 형태로 건립된 대성당 옥상에는 중심에 제단을 두고 사면에 의자를 놓아 약 5천여 명이 함께 야외미사나 행사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대성당과 묵주기도 호수 사이에는 대형 조각상으로 재현한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라도경당 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에 위치한 성당. 마라도성당은 2000년 고 민성기 신부님이 부산 대연동성당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제주교구에 기증하여 모슬포성당에서 관리하고 있다. 마라도성당은 처음에 성당으로 축성을 받았으나, 사제가 상주할 수 없어 경당이 되어있다. 단단한 전복껍데기형상 지붕에, 십자가 오상의 유리천정 빛이 내려 오도록 설계되었다. 대한민국 최남단 섬에 특별한 외관으로 사진촬영 명소가 되었다. 모슬포성당 모슬포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954년 3월 7일 모슬포 성당이 완공됨과 동시에 서귀포 본당 관할 ‘모슬포 공소’로 편입되었으며, 1958년 6월 29일 현재의 성당 봉헌식과 동시에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01년 신축교안이 발생한 이후 반(反)가톨릭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었던 모슬포에 가톨릭 교세가 호전되기 시작한 것은 6·25 전쟁 무렵부터이다. 이 지역은 이미 중일(中日) 전쟁 직후 일제에 의해 군용 비행장이 건설되면서 중국 폭격기지로 이용되었으며, 1951년 3월 21일 육군 제1훈련소가 들어선 데 이어, 중국군 포로수용소가 설치되는 등 군사 기지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 안달원(安達遠)[베드로] 신부와, 메리놀회 소속의 설리번(H. Sullivan, 薛) 신부가 훈련병 및 중국군 포로 신자들의 사목을 담당하기 위해 각각 파견되었다. 그러나 모슬포 지역의 기지촌화(基地村化)로 점차 전입인구와 교우 수가 증가하여 이들을 위한 별도의 사목이 필요하게 되자, 설리번 신부는 1952년 말 현 본당 소재지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곧바로 시작된 성당 신축 공사는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8월 5일부터 남북한 간에 포로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그 규모가 축소되었다. 이듬해 2월 15일 36평의 성당을 완공하여 3월 7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는데, 이후 이 성당은 중국군 포로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뜻에서 건축 공사에 참여했다고 하여 ‘통회(痛悔)의 집’으로 불렸다. 1955년 11월 육군 제1훈련소의 3대 군종 김덕제(金德濟)[치릴로] 신부가 새 임지로 떠나게 되면서 군종 신부의 대민(對民) 사목은 종료되고, 이 지역 신자들은 서귀포 본당 관할의 모슬포 공소로 편입되었다. 이 시기에는 가톨릭 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 : C.R.S.)의 원조 물자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전교와 연결시킴으로써 많은 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에 1957년 초 당시 서귀포 본당의 주임 브래디(R. Brady, 牟) 신부는 이 지역에 본당 신설 계획을 세운 후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1958년 6월 27일에는 모슬포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58년 성당을 완공한 모슬포 본당은, 공소 설립을 활발히 추진하여 1960년 3월 19일 무릉(武陵) 공소, 1961년 10월 22일에는 화순(和順) 공소를 각각 설립하였다. 1973년 초 7대 주임 김병준 신부는 오기선(吳基先)[요셉] 신부, 무릉 공소 회장 등과 오랜 기간에 걸친 현장 조사를 통해 대정읍 동일리 9번지에 있는 정난주(丁蘭珠)[마리아]의 묘지를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1994년 9월 25일 제주교구에서 주최한 순교자 현양 대회에서 정난주의 묘지가 성역화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이에 따라 최근 이곳은 제주의 중요한 천주교 사적지로 부상하였다. 1996년 2월에는 성당 신축 후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통회의 집을 증축하여 신자 및 지역 주민들에게 교육·결혼·회갑·회의 장소로 개방하였다. 또한 5월에는 성당 지하의 교리실을 상주 및 조문객 대기실·연도실·식당 등의 부대 시설을 갖춘 영안실[일명 ‘평화의 방’]로 개축하여 역시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정난주마리아 대정성지 백서 사건으로 순교한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본명 명련) 마리아는 남편을 잃은 뒤 2살 난 아들 경한을 데리고 조선시대 중죄인의 유배지였던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도록 할 수 없었던 모정은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해 유배 길에 추자도 예초리에 경한을 내려놓고 뱃길 중에 죽어 수장했다고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경한은 오씨 성을 가진 한 어부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졸지에 관비 신분으로 떨어진 정난주는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냈습니다.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 그리고 굳건한 믿음의 덕으로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37년을 살다가 1838년 음력 2월 병환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웃들은 정난주의 유해를 모슬포 뒷산에 묻어주었고, 1970년대 초 어렵게 묘를 찾아서 1977년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했습니다.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이자 ‘백색 순교자’인 정난주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 1994년 제주교구는 신자들의 염원을 담아 대정 성지를 조성했습니다. 김기량 펠릭스 순교현양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났습니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인 5월 31일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과 사공들에게 돌아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5년에 두 번째 난파를 당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 신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무사히 귀국한 후 육지로 나와 리델 신부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되었습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통영의 게섬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결국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고, 특히 김기량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때가 1867년 1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습니다. 제주교구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 김기량 순교비를 세웠고, 2003년 1월 조천 성당에도 순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2005년 4월 24일에는 그의 고향인 조천읍 함덕리의 함덕 중학교 서쪽 도로변에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시복시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마침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조천성당 1956년 제주 중앙본당 관할로 설립된 조천공소는 1967년 6월에 동문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새 본당으로 이관되었으며, 1975년에 첫 공소 건물을 건립한 데 이어 1996년에는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1999년 1월 7일 오랜 공소 시대를 마감하고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황사평성지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신축교안은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는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습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습니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했습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습니다. 총 면적이 약 18,000평의 황사평은 현재 신축교안 순교자 묘역뿐만 아니라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80년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으로 이장했다가 1995년 11월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28구의 유해를 합장하여 순교자 묘역을 새 단장하고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했습니다. 1998년 제주에서 활동한 외국인 성직자들을 기리는 공덕비와 제주 출신 최초의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를 세웠습니다. 2008년 제주교구는 황사평 순교자 묘역 앞에 납골당 건설 작업에 착수해 아름다운 추모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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