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의 의미 소그룹 맞춤순례 20인 이상 순례 167곳 완주 순례 자유 순례 일반여행

소그룹 맞춤순례

춘천, 원주교구 → 거룩한 3박4일 순례

거룩한 신앙선조들의 삶의 터전을 찾아서 원주 춘천교구 3박4일 성지순례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근,현대사까지 신앙 선조들의 활동무대를 통한 발자취 순례

상품기본정보

여행도시 교구별 거룩한 땅을 향하여 - 춘천, 원주교구 - 거룩한 3박4일 순례
여행기간 4일
교통편

4인 ~ 8인 전용 차량

출발일 상시

도착일 상시

호텔/객실 2인 ~4인 1실 호텔 or 리조트 or 동급
미팅장소 출발 1주일전 확정해 드립니다.
대표요금 성인 ₩ 430,000 ~
모객현황

상품가격

요금구분 가격 예약
2인 ~4인 기준 금액 숙소 확정에 따라 변동됨 예약하기

상품특전

►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출발 부터 성지 관련 안내는 물론 차량 운영이 가능한 드라이브 스루 가이드가 함께하며 편안하게 모십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

►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령도 여객선 탑승을 위해 개인 신분증을 꼭 지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 석식) 3일차 (조,중,석식) 4일차(조,중식)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

불포함사항

►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특이사항

►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쇼핑센터

NO쇼핑

일정표

묘재(성인 남종삼 · 순교자 남상교 유택지)

 

묘재는 남종삼 요한 성인의 아버지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가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이사한 곳으로 남종삼 성인이 살던 곳이다.

남종삼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학문과 사상, 그리고 천주교 입교등에서 아버지 남상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원래 생부는 남원교이나 종숙부인 남상교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로 갔다.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프랑스 주교들을 통해 서구 열강과 동맹을 맺으면 러시아의 남하를 막을수 있다는 상소문을 올렸고, 대원군은 남종삼의 상소문을 받아들였으나 주교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기 전에 상황이 바뀌어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남종삼은 묘재에서 피신하다가 붙잡혀 순교하였다.

남상교는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아들 남종삼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 뒤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1920년대부터 이 마을에 신자들이 들어와 살면서 교우촌을 이루었고, 1938년에 목조 건물의 공소를 신축하였다. 유택 앞에있는 옛 공소 건물은 19559월에,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학산 공소는 1989년에 신축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저작권 안내 - http://www.cbck.or.kr/Copyright ]

 

배론성지

배론 성지는 박해를 피해 산과 계곡으로 숨어든 교우들이 모여 이룬 교우촌으로 주로 옹기 굽는 일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앞길이 창창했던 황사영은 천주교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되어 세례를 받은 후에는 벼슬길도 마다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배론으로 들어왔습니다. 그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 썼는데, 그것이 황사영 백서입니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혀 황사영도 대역무도의 죄인으로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옹기 토굴 옆에는 1855년 장주기 회장의 초가집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복원되어 있고, 그 뒷산에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습니다. 이렇듯 배론 성지는 교회사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으로, 200132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성지 일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배론 성지는 1999년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고 시복 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합니다. 또한 대성당과 소성당 두 동으로 건립된 기념성당은 성지 주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이라 불려온 지명과 어울리도록 배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200210월에는 성지 초입에 순례자들의 집을 봉헌하였고, 200411월에는 대성당 뒤편에 최양업 신부의 거룩한 삶의 여정을 한눈에 보고 묵상함과 동시에 산 이와 죽은 이가 한자리에서 만나 기도할 수 있는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을 조성해 봉헌하였습니다. 2005년 피정의 집으로 사용되는 순교자들의 집을 새로 단장해 축복식을 가졌고, 20109월에는 신자들에게 문화와 영성을 교육하고 교구 교회사와 영성을 기록 · 보관 · 연구함으로써 교회와 지역사회 문화 발전에 기틀이 될 문화영성연구소를 설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20183월에는 성지 내에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용소막성당

용소막 성당은 1904년 강원도에서 풍수원, 원주(현 원동 주교좌)에 이어 세 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무렵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용소막 인근에 흩어져 살다가 1893년부터 용소막으로 한두 집씩 이사 오고, 당시 전교회장으로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던 최도철 바르나바까지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교세가 커지자 시잘레 신부는 성당 신축에 나서 착공 3년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습니다. 일제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성당 또한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원형을 거의 보존할 수 있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6년에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성당 구내에는 본당 출신으로 공동번역 성서 발간에 큰 업적을 남기고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한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동상과 유물관이 있습니다. 또한 피정의 집인 두루의 집과 교육관이 있고, 100주년을 기념하며 성당 뒷산에 마련한 십자가의 길과 묵주기도의 길도 있습니다. 한편 성당 건립 100주년을 앞두고 정부 지원과 신자들의 정성으로 낡은 성당에 대한 문화재 보수작업을 진행해 201410월 성당복원 완공 감사미사를 봉헌했습니다.

 

흥업 성당 대안리 공소

대안리 공소는 19101112일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에 의해 축성된 목조 가구식 한옥 형태의 성당 건물로 200412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4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구전에 의하면 대안리 공소는 1892년에 설립되었고, 현 공소 건물은 1900-1906년 사이에 완공되었습니다. 원주교구에서 1892년 이전에 설립된 본당은 풍수원 본당밖에 없을 정도로 유서 깊은 공소입니다. 이렇듯 일찍이 공소가 설립된 이유는 대안리 일대가 교우촌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소 건물은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풍상을 겪었습니다. 원래 초가지붕이었으나 1950년대에 초가를 걷어내고 기와를 얹었고, 1960년경에는 공소를 거의 두 배 가까이 확장했습니다. 1986년에는 창틀을 알루미늄으로 교체하고, 내부 흙벽에 합판을 덧대고, 입구에 현관을 따로 만들었습니다. 대안리 공소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 막사로 사용됐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미군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배급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무농약, 오리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공소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2009년 원동 주교좌성당에서 흥업 성당이 분리 · 신설되면서 흥업 성당 관할 공소가 되었고, 201011월 공소 축복 100주년을 맞아 축하식을 거행하고, 공소 맞은편에 새로 건립한 교육관 축복식도 가졌습니다. 2012년에는 등록문화재 지정 후 처음으로 보수를 위한 원주시의 지원이 결정되어 이듬해부터 원형을 유지한 전반적인 보수와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산 부족으로 일부 개선 후 중단되었다가 2016년 원주시의 지원으로 복원 공사가 재차 진행되어 본래의 말끔한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강원 감영

강원 감영은 조선시대 강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래서 원주 일대의 죄인들이 강원 감영으로 끌려와 정청인 선화당에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는 국사범 등의 중죄인은 물론 잡범들에 대한 형도 집행됐는데 박해가 일자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처형되었습니다.

 

강원 감영의 정문인 포정루와 정청인 선화당은 건립 당시 위치에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조선시대 감영의 형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래서 19711216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는데, 지정 당시 명칭은 강원 감영(문루 및 선화당)이었으나 2004117포정루 및 선화당으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포정루와 선화당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박해의 현장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20148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김강이 시몬, 최해성 요한, 최 비르지타 등 많은 순교자들이 강원 감영의 옥에서 혹독한 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하거나 치명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옥터와 참수터의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고, 다만 짐작되는 곳에도 이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복원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원주시는 강원 감영지에 있던 원주시 제2청사를 철거하고 지속적인 발굴과 복원 작업을 진행해 201811월 복원기념 준공식을 거행했습니다.

원동 주교좌성당

원주교구의 주교좌인 원동 성당은 1896817일 풍수원 본당에서 분리 · 신설된 원주 본당을 그 모태로 합니다. 1902년 드브레 신부 때 신자들의 증가로 인해 사제관 근처 대지를 매입해 오늘날 성당의 터전을 마련했고, 1904년에는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 분리했습니다. 1913년 조제 신부가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완공하여 뮈텔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올렸고, 1950년 디어리 신부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성당과 1934년에 설립된 소화유치원이 전소되었습니다. 본국으로 갔다가 195110월에 돌아온 디어리 신부는 교우들과 함께 성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여 19549120평 규모의 시멘트 벽돌 성당을 완공했습니다.

 

1971년 원주 문화 방송국의 부정으로 야기된 부정부패 규탄대회가 원동 성당에서 열리고,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 이후 시국과 관련한 많은 기도회가 개최됨으로써 원동 주교좌성당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본당 설립 100주년을 준비하며 19908월 교육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했고, 1995년 성당과 수녀원 등을 보수하고 이듬해 10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원동 성당은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상태 그리고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 등을 인정받아 20041231일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본당 설립 120주년을 기념해 문화재청과 원주시의 지원을 받아 성당 내외부 복원 공사를 시행했습니다.

 

풍수원 성당

풍수원 성당은 1888620일 강원도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1801년경으로 박해를 피해 서울과 경기도 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이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면서부터입니다. 이들 중에서 신태보 베드로는 40여 명의 교우들을 이끌고 강원도 횡성군 풍수원으로 들어섰고, 이들이 바로 풍수원 교우촌을 이룬 당사자들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와 1871년 신미양요로 고향을 떠난 많은 교우들을 불러 모아 큰 촌락을 이루었고,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을 자유를 얻기까지 80여 년 동안 목자 없이 평신도들로만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믿음을 지켜왔습니다.

 

1888년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는 신자들의 열망을 수용하여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르 메르 신부를 임명했습니다. 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현재의 성당을 1905년 착공하여 1907년 준공하고 1909년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자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인 풍수원 성당은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고, 성당보다 5년 늦은 1912년 건축에 들어간 구 사제관은 원형이 잘 보존된 벽돌조 사제관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5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런 교회사적, 문화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풍수원 성당은 횡성군과 함께 성당 일대에 유현 문화관광지(바이블 파크)를 조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1단계 사업으로 성당 뒤에 강론 광장을 조성하고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여 20134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이어 유물전시관 뒤에 가마터와 원(), 쉼터 등을 조성하며 2단계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20186월에는 구 사제관을 복원하여 풍수원 성당 역사관으로 축복식을 갖고 개관했습니다.

 

포천순교성지(천주교 홍인 레오 순교터)

포천 지방은 1801년 신유박해 때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그의 아들 홍인 레오의 순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믿음의 뿌리가 깊은 곳입니다. 신유박해 이후 박해를 피해 다른 지방의 신자들이 포천 지방으로 옮겨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1900년 초 포천군 포천읍 선단리 해룡마을에 포천 지방 최초의 공소가 설치된 이후 내촌, 맑은 데미, 송우리, 고일리, 오가리, 새묵이 등지에 공소가 설정되었다고 합니다.

 

1956년 포천 본당이 설립된 데에는 6군단 군단장 이한림 가브리엘 장군의 도움이 컸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신앙 역사가 신유박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포천에 성당이 없는 것을 알고 1955년 포천 어디서든 잘 보이는 왕방산 기슭 언덕의 기증받은 부지에 화강석으로 성당을 건립했습니다. 195511월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12월에 춘천 대목구장 퀸란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19562월 김진하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포천 본당이 설립되어 춘천교구 서부 지역, 즉 경기 북부지역 복음화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625 전쟁 후 군부대 지원을 받아 지어진 옛 포천 성당은 19907월 한 취객의 방화로 목조 마룻바닥과 지붕틀 등이 불타 뼈대만 남았지만, 역사 보존 차원에서 199212월 새 성당을 건립해 봉헌한 후에도 헐지 않고 보존했습니다. 옛 포천 성당은 전쟁 직후 건축된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특징과 화강석 조적구법을 잘 간직하고 있고, 전쟁 이후 군부대가 직접 건립한 것 중 유일하게 남은 종교 건축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9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홍교만과 홍인 부자는 20148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이를 계기로 춘천교구는 같은 해 9월 홍인 레오의 순교터를 순교성지로 선포했습니다. 포천 성당은 순교터인 한내천변에 부지를 마련해 2015년 복자 홍인 레오의 순교 정신을 기리는 순교현양비를 건립해 축복식을 갖고 포천 순교성지를 조성했습니다. 2019년에는 포천 순교성지 조성 3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천주교이벽요한세례자 진묘 터

광암 이벽은 한국 천주교 초기 평신도 가운데 주요 역할을 한 지도자이며, 한국 천주교회는 현재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안건으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이벽은 1777년 권철신, 정약전 등과 함께 강학을 하였고, 1784년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 발생하자, 평소 천주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유림들이 반발하였고, 이벽도 가족들에게 배교를 강요받았다. 이벽은 자신이 선택한 천주 신앙과 부모에 대한 효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화현리 집에서 아사(餓死)한 것으로 추정한다.

 

포천 화현리는 이벽의 부친인 이부만부터 그의 증손까지 4대의 묘가 들어선 선영과 이부만과 그 후손들이 살았던 집터가 있는 곳이다. 이벽의 생가터는 포천시 화현면 543-1번지로 추정된다. 이벽의 묘는 포천시 화현면 산 289-1번지 공동묘지 갓등산 낮은봉에서 1979215일 발견되었는데, 그의 유해와 지석은 1979624일 천진암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진묘 터에는 이장 이후 조성된 봉분과 묘비가 있으며, 본래 있던 묘의 진토(塵土)는 남아있다. 2019년 현재 춘천교구는 진묘 터 근처에 성지를 조성하고 있다.

 

죽림동성당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모체는 1920년 풍수원 성당에서 분가한 곰실 본당으로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의 헌신적인 전교 활동의 결과로 설립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우연히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구도의 길을 걷게 된 그는 가족과 함께 천진암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고은리의 한 폐가를 사서 정착한 후 자선과 모범적 신앙생활로 이웃들을 감화시켜 300명에 가까운 신자가 생겼습니다. 엄주언 회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1920년 공소를 건립하고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그해 9월 김유룡 초대 주임신부가 부임하여 춘천 지역 최초의 본당이 되었습니다.

 

그 후 곰실 본당은 춘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1928년 현 죽림동 성당 아래 땅을 사서 춘천 본당을 설립하였습니다. 1938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춘천 본당 제5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 토마스 신부는 부임 직후 인근 대지를 매입해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1940년 제2대 춘천 지목구장으로 임명된 퀸란 신부는 19494월 새 성당 건립을 시작했지만, 다음 해 6·25전쟁의 발발로 인민군에게 피랍되었고, 성당 또한 19515월 유엔군의 반격 공습 중 일부 파손되었습니다. 전쟁 중인 19518월 제13대 주임으로 부임한 커머포드 신부는 복구 작업을 시작해 미군과 교황청의 도움으로 1953년 대부분 마무리했습니다.

 

1950년 본당명을 죽림동 본당으로 변경한 후 오랜 풍상으로 노후화되자 춘천교구는 죽림동 성당에 대한 대대적인 중창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번 작업에는 많은 미술가와 건축가들이 참여하여 전례 거행에도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빼어난 성당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죽림동 성당 터를 마련하고 그 기초를 놓은 엄주언 회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성당 언덕 아래 춘천교구 가톨릭 회관으로 사용할 말딩회관(사제관 포함)을 건립하여 19994월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2003625일 죽림동 성당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호로 등록되었습니다. 2013121일 성당 앞 부지에 전정, 중정, 회랑 등을 지은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 축복식을 거행했고, 201461일에는 교구와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을 청동으로 제작해 설치한 후 축복식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201796·25전쟁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 성당의 교구 순교자 묘역이 성지로 선포되었습니다.

 

거두리성당 곰실공소

곰실 공소는 춘천교구와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모체가 된 곳으로 1920년 풍수원 성당에서 분가하여 본당으로 설립되었습니다. 곰실 본당의 설립에는 한 청년의 헌신적인 전교 활동이 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872년 춘성군 동면 노루목에서 태어난 엄주언 마르티노(말딩)는 청년 시절 우연히 천주교 서적을 읽고 구도의 길을 걷기로 한 후 가족과 함께 천진암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전교의 사명을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고향에서 쫓겨난 그는 고은리의 한 폐가를 사서 정착한 후 자선과 모범적 신앙생활로 이웃들을 감화시켜 300명에 가까운 신자가 생겼습니다. 엄주언 회장의 헌신적 노력으로 1920년 공소를 건립하고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그해 9월 김유룡 초대 주임신부를 모시고 춘천지역 최초의 본당이 되었습니다.

 

그 후 춘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1928년 현 죽림동 성당 아래 땅을 사서 죽림동 본당의 전신인 춘천 본당을 설립하였습니다. 본당이 춘천으로 옮겨간 후 곰실 본당은 공소로 변경되었고, 1969년 효자동 본당이 분가한 후 효자동 관할 공소가 되었습니다. 춘천 교구는 19981111일 성 마르티노 축일에 죽림동 본당의 모체가 된 곰실 공소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던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을 비롯해 평신도 사도직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며 춘천지역 선교의 초석이 된 평신도들을 기리기 위해 평신도 추념의 날을 제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습니다. 20069월에는 곰실 공소가 죽림동 주교좌본당과 춘천교구 자체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살려 효자동 본당 관할에서 죽림동 주교좌본당 관할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풍상으로 낡은 곰실 공소 내부를 새롭게 단장하여 20091111일 중창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현재 곰실 공소는 거두리 본당 관할로 변경되었습니다.

 

홍천성당

홍천 지역에 언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는지는 불분명하나 1903년 풍수원 본당 교세 보고서에 송정 공소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공소 설립 시기는 1902-1903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송정리(현 홍천군 화촌면)는 박해시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들어와 터를 일구고 산 옹기촌으로 유명했습니다. 19236월 본당으로 승격된 후 교세 확장을 위해 읍내에 부지를 매입하여 1936년 이전했습니다. 1939년 강원도 지역 사목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되면서 골롬반회 소속 신부들이 본당 사목을 담당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종료될 즈음 부임한 최동오 신부는 19539월 전쟁으로 파괴된 목조 성당을 재건하고 현 성당의 신축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한편 한국 전쟁 중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을 경험하고 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19548월 주임으로 재부임한 크로스비 신부는 성당 신축 공사를 이어받아 19554월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습니다. 미군 공병대의 도움과 최동오 · 크로스비 신부 그리고 신자들의 헌신으로 건립된 홍천 성당은 돌에 홈을 파서 끼워 넣는 식으로 외벽을 축조한 것이 특징이며, 특히 성당 바닥 마루는 그 아래 넓은 공간을 두고 습기 방지를 위해 새끼줄 타래를 깔아 놓아 현재까지도 양호하게 보존되고 있습니다.

 

홍천 성당은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축물로 보존 및 연구 가치가 높아 20054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보수작업을 벌여 정면과 측면 강화유리문을 동판으로 교체하고 창문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습니다. 석조물로 제단을 새로 꾸미고 안나의 집 증개축과 기도실을 신축하여 200612월 중창(重創)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소양로성당

광복 무렵 죽림동 본당 관할이었던 소양로 지역의 신자수가 늘어나자 19501월 소양로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콜리어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리어 신부는 성체를 옮겨 모시고 신자들에게 피신을 권고한 후 사태를 지켜보다가 627일 죽림동 주교좌성당으로 이동하던 중 체포되어 복사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공산군에게 심문을 받고 이동 중에 총살당했습니다. 이로써 콜리어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가운데 한국 전쟁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성당 마련이 늦어지다가 19563대 주임으로 부임한 버클리 신부가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939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버클리 신부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해,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가도록 했습니다. 소양로 성당의 이러한 건축기법은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적절히 혼합된 형태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5415일 등록문화제 제16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소양로 성당은 2006년부터 문화재청과 강원도 및 춘천시의 도움을 받아 원형 보존 작업을 시행했습니다. 이음매가 낡은 함석지붕과 창호를 보수하고 없어졌던 성가대와 벽 제대를 복원했으며, 붉은 카펫이 깔려있던 제단을 나무 널판으로 바꾸고 목조 난관으로 그 둘레를 둥글게 감았습니다. 성전 외벽을 두르고 있던 전선을 모두 지하로 넣어 원형을 최대한 살려 20095월 중창(重創)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또한 춘천교구는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소양로 성당을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콜리어 신부는 현재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시복 대상자 중 한 명으로 시복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양양성당

영동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양양 지역은 섭가지 · 풍수원 · 원산 · 안변 · 내평 본당 관할을 거쳐 192155양양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1922년 양양읍 서문리에 지은 성당이 1936년 수해로 침수되자 시내 중심지의 현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3대 이광재 신부가 1940년 성당과 교육회관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겼고,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남하할 때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06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갇혔다가 109일 총살당했습니다. 전란 중 화재로 소실된 성당은 동명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맥고완 신부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양양 지역을 맡아 사목하면서 신축하였습니다.

 

양양 성당은 이광재 신부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이광재 신부 순교 기념각을 세웠습니다. 2000년 순교 50주년을 맞아 순교각 옆의 옛 수녀원 건물에 기념관을 개관하고, 전쟁 중 신자들이 옹기에 숨겨놓고 피난을 떠난 덕에 남은 이광재 신부의 제의와 제구, 친필 교리서 등의 유품과 사료들을 전시하였습니다. 이광재 신부는 20071940-50년대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한 춘천교구의 조사를 통해 그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200969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옆에 석상이 봉헌되었습니다. 춘천교구는 20179월 양양 성당을 성지로 선포했고, 현재 이광재 신부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안건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주문진 성당 행정 공소

주문진 본당은 19231123일 금광리에서 사목하던 이철연 신부가 주문진(현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원길 51)으로 이전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으며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이다. 본당 설립 전의 주문진은 경상도 경주에서 박해를 겪은 두 형제가 양양군 현남현 견불리에 정착하기까지 이 지방은 신앙의 불모지였다. 그들은 토기업에 종사하며 가족들을 이끌고 주문진으로 이사하여 정착하면서 또 다른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원산본당에 소속되어 봄, 가을로 판공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강릉 아래의 금광리(현 강릉시 구정면 금평로 514)신자들은 1921년의 가을 판공 때 양양본당 주임신부에게 보좌신부인 이철연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는데 실제로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수도 많았고 공소 강당과 신부가 머무를 수 있는 사제관도 마련해 놓아 사제 파견 요청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신부를 파견해 주기로 약속하였고 이철연 신부는 1921122일 금광리로 내려가 금광리본당(주문진본당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이철연 신부는 금광리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이 곳 신자들이 열심이긴 하나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고 발전가능성도 없다고 판단하여 장차 양양이나 주문진, 강릉지역으로 본당 중심지를 옮기려고 생각하고 양양본당의 최문식 신부와 상의하여 주문진으로 이전을 결정하고 먼저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과 사제관을 짓기로 하였다. 1923년 초 작은 야산과 그 아래에 너와집 한 채가 있는 땅을 매입하여 6월에 비가 새는 지붕을 기와로 개량하고 집을 증축한 뒤 19231123일 금광리를 떠나 주문진(현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원길 51)으로 이전하였으며 이때부터 주문진 본당이라 명명하였다.

 

본당을 주문진으로 옮긴 후에 전교는 활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 개항된 주문진보다 강릉 지역이 더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설상가상으로 19291월에 주문진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화재 후 김인상 신부는 본당을 금광리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강릉으로 이전하였다. 전소된 성당과 본당신부의 부재로 주문진 본당은 22년간 공소가 되었다.

 

195111,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신부가 주문진 공소로 부임하면서 서서히 교세를 회복하여 신자수가 300여명에 이르러 19551월 새로운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에는 성모상을 건립하여 안치하고, 제의방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 일부(모발, )를 모시게 되었다. 1958년에는 행정 공소(강릉시 연곡면 행정214, 벽돌을 교우들이 구워 만든 공소로 교구의 사적지)와 인구 공소, 1959년에는 삼산 공소를 신축하였으며 꾸리아의 발족 및 여러 단체들이 신설되고 활성화되면서 본당으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196793일 교구와 골롬반 외방선교회에서 관할하던 주문진 성당은 작은 형제 수도회로 사목이 위임되었다. 작은 형제 수도회는 30년간 주문진 본당에서 사목을 하면서, 신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고 그 외에도 본당 주보를 창간하고 학생회와 청년회 등 여러 단체를 신설하고 영동지구 청년회원들의 모임인 형제들의 모임을 조직하여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1985년에는 아씨시의 전교 수녀회가 진출하도록 하였다.

 

199793일 작은 형제 수도회가 주문진 본당에서 철수하고 춘천교구에 사목권을 위임하면서 주문진 성당은 교구 소속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수도회에 의해서 30년간 사목되어지던 본당에 부임한 교구 사제는 본당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였고 199811주문진 본당 75년사를 발간하였으며 성서 백주간 및 성서쓰기 운동을 전개하며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20028월 태풍 루사의 피해로 성당 곳곳이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사제수도자평신도 모두가 힘을 합해 새롭게 중창을 하여 전국의 많은 성당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아름다운 성전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교구에서는 주문진 관할터(영동지구와 영북지구의 가운데 격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영동·영북 지구를 사목적 배려하기 위하여 교구 제2청사를 지어 교우들의 교육/피정/연수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 · 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임당동성당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0년대에 이미 강릉군 내에 삼정평, 새울,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19215월 양양 본당, 12월 금광리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적어 1923년 말에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했습니다. 1929년 성당 화재 이후 잠시 금광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4년 발전 가능성이 더 컸던 강릉으로 다시 이전했습니다.

 

강릉으로 이전한 후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중 광복을 맞았고, 광복 후 본당의 내실화는 물론 사회복지와 교육사업 등을 통해 지역과 함께하는 본당 공동체를 구현했습니다. 1951년 대지를 매입한 뒤 195510월 현재의 성당을 신축했고, 1974년 본당 명칭도 강릉 본당에서 임당동 본당으로 바꾸었습니다. 1981년으로 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아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1991년에는 성당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청동 십자가, 제대, 14, 유리화 등을 갖추고 199211월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 화보집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199811월에 노후화된 사제관, 수녀원, 유치원을 신·증축하여 본당의 면모를 일신했습니다.

 

성당 앞 왼쪽에는 강릉 대도호부 관아가 있습니다. 이곳의 칠사당과 객사문에서 병인박해 당시 많은 신자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 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 기법에서 보존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2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91월에는 성당 옆에 신축한 임당동 근대문화유산 유물전시관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노암동 성당 금광리 공소

금광리 공소는 1887년 설립된 강릉 지역 천주교의 모태와도 같은 곳입니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계기는 대원군에 의해 일어난 병인박해(1866)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진 시기는 19세기 말경인데,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과 현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공소 초기 원산 본당 관할이었으나 주문진 성당 공소를 거쳐 현재는 노암동 성당 관할 공소입니다. 1921년 한때 금광리 공소는 양양 본당 보좌신부의 파견으로 본당이 되기도 했지만, 지역적으로 외진 이유로 1923년 주문진에 새 부지를 마련해 이전함으로써 주문진 본당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묵호성당,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터

6.25때 학살당한 라 바드리치오 신부가 사목하던 성당과 순교터

1931년 하경연 요셉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묵호지역은 1940년 강릉 본당(현 임당동 본당) 관할의 묵호 공소가 설정되었으며 19486월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는 맥간 프란치스코(F. McGann Francisco 1948~1949. 9) 신부가 부임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북한군에 의해 성당이 점거되고 주임신부가 피살되었다. 당시 묵호 본당은 제2대 주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출신 패트릭 레일리(Patrick Reilly, 1915.10.211950.8)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다. 라 바드리치오 신부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레일리 신부는 1915년 아일랜드에서 출생해 1940년 사제품을 받은 후 19493월 묵호 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625전쟁 발발과 동시에 인민군 육전대 병사 1800여 명은 동해안 옥계, 정동진, 금진 지역에 기습 상륙, 그날 묵호를 점령하였다. 묵호 축항사무소(현 동해지방 해운항만청)에 근무하던 최창환 요셉이 배를 구해 레일리 신부를 찾아가 피난을 간곡히 권유했다. 하지만 레일리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할 수 없다"며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레일리 신부는 묵호성당이 인민군에게 징발되자 묵호읍 만우리에 있던 남봉길(프란치스코) 전교회장 집에 잠시 피신해 있다가 남 회장과 함께 체포됐다.

묵호 읍내로 끌려간 레일리 신부는 이후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아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불안해하던 공산군에 의해 밤재굴에 몰린 채 학살당했다. 당시 군종 사제였던 이경재 신부가 해군 사령관 백기조 대령과 함께 도로변에 묻힌 레일리 신부의 유해를 찾아내 묵호 경비사령부 앞에 매장하였다가 묵호성당으로 옮겼으며, 이후 레일리 신부의 시신은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에 이전 안치되었다.

후베르토 신부는 "레일리 신부를 비롯한 포로들이 밤재굴 근처에 다다랐을 때 아군 전투기가 나타나 기총소사를 하자 공포에 질린 인민군들이 포로들을 밤재굴에 집어넣고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후베르토 신부는 이어 "레일리 신부 시신은 해군 장교 신자에 의해 산속에 가매장됐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묵호를 재탈환한 직후 한국인 군종 신부가 거두어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 성당으로 옮겼다"고 덧붙였다. 레일리 신부의 장례미사는 195110월에 가서야 치러졌다.

 

라 바드리치오 신부가 1950829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공산군에 의해 학살당한 밤재굴 순교터는 묵호성당에서 강릉방면 7호선 국도 동해대로로 15km 거리에 있다. 강릉시 옥계면 밤재 철도굴(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16-2) 남쪽 굴 입구에서 약 200m 남쪽에 라 바드리치오 신부 순교비가 있는 주변이 순교터로 알려져 있다.

 

 

성내동성당

성내동 성당은 1946년 강릉(현 임당동) 본당의 삼척 공소로 시작해 194910월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매긴 신부는 19507월 북한군에게 피살되어 순교했고, 이듬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버크 신부가 본당의 기틀을 다져 나갔습니다.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코너스 신부는 현 성당 부지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해 195711월 본당을 이전했습니다. 196111월 본당 구내에 성 요셉 의원을 개원했고, 19653월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분리되면서 원주교구 소속이 되었습니다. 196610월 본당 이름을 삼척에서 성내리로, 198810월 성내동으로 변경했습니다.

 

성내동 성당은 동산 위에 있어 삼척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건립되었습니다. 19573월 본격적으로 성당 건축을 시작했는데, 설계도는 춘천교구장 퀸란 주교가 보내왔고, 시공은 강릉 임당동 성당과 묵호 성당을 시공한 경험이 있는 중국인 신자 가()씨가 맡았습니다. 여러 어려움 중에 공사를 마무리해 1957115일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건평 133평의 성당과 30평의 사제관은 당시 춘천교구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성내동 성당은 1950년대 후반의 지방 건축기술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200412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9910월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진 야고보 신부 순교기념비를 건립해 축성식을 가졌고, 2009년 본당 설립 60주년을 준비하면서 삼척시의 지원을 받아 성당 정면에 시내와 연결되는 계단을 만들고, 계단과 시내가 맞닿은 곳에 광장도 조성했습니다. 200911월 본당 설정 6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20106월 진 야고보 신부 순교 60주년 기념 성삼 교육관 축복식, 201511월 진 야고보 신부 흉상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진 야고보 신부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가운데 한 명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여행전체크사항




- 여권이 있으신 분은 여권에 기재된 정확한 영문이름을 알려주세요.
- 여권 기간만료일을 확인하시어, 출발일로부터 최소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합니다.
- 계약 후 3일 이내에 1인 총금액의 10 ~ 20%를 계약금을 입금하셔야 계약이 성립됩니다.
*리조트에 따라 변동
- 계약금은 상품별로 상이 하므로 자세한 사항은 문의 바랍니다.




- 여권 기간만료일을 확인하시어, 출발일로부터 최소 6개월 이상 남아 있어야 합니다.
- 여권 기간만료일이 6개월 미만이거나, 이미 만료된 여권은 기간연장 또는 재발급 하셔야합니다.






특별약관은 신혼여행상품에 한정하며 허니문특수성 및 항공좌석과, 호텔에 대한 선납금으로 인하여 일반약관에 우선하여 효력이 발생하며 별도의 취소료가 적용됨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허니문 예약 발생효력 시기는 계약금입금과 동시에 성립하며 상품예약후 취소를 할 경우에는 아래와 같이 계약금 환불규정 및 여행상품 판매가 기준으로 취소료가 발생합니다.

제1조. 계약금 환불규정
- 신혼여행 계약후 7일이내 취소시 계약금 전액 환불되며, 7일 이후 취소시에는 계약금 전액
환불되지 않습니다.
(단, 환불전액 및 일부 불가라고 사전공지된 항공좌석과, 호텔에 대한 선납금은 날짜와 관계없이
입금과 동시에 전액 환불되지 않습니다.)

제2조. 리조트 취소 위약금 규정(선입금 및 계약금 별도)
- 출발일기준 30일전 취소시 상품판매가의 10% 취소위약금 배상
- 출발일기준 29 ~ 21일전 취소시 상품판매가의 20% 취소위약금 배상
- 출발일기준 20 ~ 15일전 취소시 상품판매가의 30% 취소위약금 배상
- 출발일기준 13 ~ 2일전 취소시 상품판매가의 50% 취소위약금 배상
- 출발일기준 1 ~ 당일 취소시 상품판매가의 100% 취소 위약금
- 단 풀빌라 및 특수지역의 리조트는 위 규정과 상관없이 화이날통보(여행 진행의 최종확인)한
날부터 취소 위약금이 발생되며, 전체 리조트 요금에 100% 취소 위약금 배상




- 국제유가와 항공사의 영업환경을 고려한 국토교통부의 국제선 항공요금과 유류할증료
확대방안에 따라 예고 없이 인상되거나, 인하된 금액이 반영될 수 있습니다.




- 당사의 모든 기획 상품은 여행자 보험에 가입됩니다.
(만 1세 이상 ~ 만 89세 미만의 경우만 해당됩니다.)
일반 상해 - 최대 300만원, 질병 - 최대 100만원, 휴대품 도난 및 파손 - 최대 30만원 등
- 상세내용은 약관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1억 여행자 보험 가입)




- 출발 전 설명회는 출발 3 ~ 7일전에 진행됩니다.
- 설명회는 전화 또는 메일로 진행됩니다.
- 설명회 시 공항 미팅여부, 시간, 장소 그리고 출국편명을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가방은 여행기간에 맞춰 크기를 선별하여 준비하시고, 보조가방(쌕, 크로스백)을 따로 준비하시면
좋습니다.
- 의류와 속옷, 양말 등은 여행지의 기후, 일정에 맞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더운 지방의 경우 수영복, 물안경, 선글라스, 모자, 선크림, 파라솔 등을 준비하시고, 냉방시설을
감안하여 긴팔남방을 준비하셔야 됩니다.
- 칫솔, 치약, 면도기, 샴푸, 린스, 화장품, 여행용화장지등 개인위생용품은 따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 디지털 카메라인 경우는 메모리카드 및 예비 바테리를 여행일정에 맞게 준비하시고
충전기도 잊지마시고 준비하십시요.
*여행지역에따라 전압 콘센트 또는 어댑터가 틀릴 수 있으므로 여행사에 꼭 문의 바랍니다.
- 카메라(필름사용)소지하신분들은 출발전에 여분의 필름을 충분히 준비하시고 또한
건전지는 넉넉하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수첩과 필기구, 회화집 등도 준비하시면 편리합니다.
- 개인취향에 맞게 컵라면, 김 등 밑반찬을 준비하시고, 구급상비약도 챙기시기 바랍니다.

* 기내휴대품 반입 금지 품목은 미리 붙이는 가방(수화물 또는 위탁수화물)
예) - 건전지, 면도기, 손톱 깎기, 칼 등은 기내용 가방에 넣을 수 없으므로 붙이는 가방에 넣어주세요.

- 100ml를 초과하는 액체, 분무, 겔류 등도 붙이는 가방에 넣어주세요.

* 라이터는 붙이는 가방에 넣을 수 없으므로 휴대가방에 1인 1개만 허용됩니다.






- 2007년 3월 1일부터 국제선을 이용하시는 모든 승객들은 100ml가 초과하는 액체, 분무, 겔류의
기내 휴대 반입이 제한되었습니다.
- 100ml이하의 등 물품은 별도의 정해진 팩(일명 지퍼백)에 넣어 반입하셔야 되며, 100ml를 초과
하는 물품은 반드시 붙이는 가방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 국토교통부는 국민여행편의 제고와 동시에 항공보안 강화를 위해 2014년1월1일부터
[항공기내 반입금지 물품]을 변경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국토교통부 [항공기 반입금지 물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관련 홈페이지: http://www.molit.go.kr/doc/apdg/guide1.jsp#

- 위의 사항으로 출국수속시간이 지연될 수 있으므로 정해진 미팅시간을 준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 유명 관광지 및 기차역 주변, 기타 사람이 많이 밀집된 곳에서는 소매치기 또는 분실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므로 특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여행 중 도난에 의한 물건 분실의 경우 반드시 현지 경찰서의 경위서(Police report)를 받아오셔야
보험적용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본인 실수에 의한 분실은 보험 처리되지 않습니다.)

[여행경보단계안내]

외교통상부에서는 해외여행, 체류시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국가와 지역에 경보를 지정하여 위험수준과 이에 따른 안전대책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남색경보(여행유의 일부)/황색경보(여행자제 일부)/적색경보(철수권고 일부)/흑색경보(여행금지) 4단계로 구분하여 지속적으로 변경되고 있으니 출국 전 꼭 확인을 부탁드리며,
해외여행 등록제를 이용하시면 해외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 사고로부터 효율적인 도움을 제공해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외교통상부 여행경보제도 안내 페이지(http://www.0404.go.kr/country/warningList.do?menuNo=102000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여행경보단계안내]
외교통상부에서는 해외여행, 체류시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국가와 지역에 경보를 지정하여
위험수준과 이에 따른 안전대책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남색경보(여행유의 일부)/황색경보(여행자제 일부)/적색경보(철수권고 일부)/흑색경보(여행금지)
4단계로 구분하여 지속적으로 변경되고 있으니
출국 전 꼭 확인을 부탁드리며, 해외여행 등록제를 이용하시면 해외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
사고로부터 효율적인 도움을 제공해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외교통상부 여행경보제도 안내 페이지(http://www.0404.go.kr/country/warningList.do?menuNo=102000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회사소개 여행약관 개인정보취급방침 찾아오시는길 순례센터 인트라넷
여행문의 : 031-706-9175 | 팩스 : 031-707-9176 | 메일 : yeollijea@naver.com
상호명 : (주)점프투어리즘 |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매화로 48번길 18-4 101호
대표자 : 김각현 <사업자정보확인> | 관광업신고번호 : 제159호
사업자등록번호 : 129-86-64181
Copyright ⓒ (주)점프투어리즘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