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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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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청주교구 → 3박4일 박해역사의 시작에서 마침까지 함께한 신앙선조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찾아서 3박4일간 대전교구내 포함된 모든 성지 전체를 순례하며 기도하고 묵상하는 일정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상품특전►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출발 부터 성지 관련 안내는 물론 차량 운영이 가능한 드라이브 스루 가이드가 함께하며 편안하게 모십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 석식) 3일차 (조,중,석식) 4일차(조,중식)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 불포함사항►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특이사항►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쇼핑센터NO쇼핑 일정표
성거산성지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서 차령산맥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보기 드문 곳입니다. 성거산 주변에는 박해 당시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교우촌)이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으로 서덕골, 먹방이, 소학동,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가 은거했던 곳이고, 박해가 끝난 뒤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입니다. 또한 병인박해 때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입니다. 그 중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공주 감영에서 참수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성지 전체로는 제1줄무덤에 38기, 제2줄무덤에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있어 실제 안장된 순교자는 훨씬 많다고 합니다. 1959년 미군의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상의 묘봉 수가 107기였다고 하니, 이곳은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순교를 당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입니다. 성거산 성지는 2008년 12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등록되었고, 2011년 5월 성거산 아래 성지 초입에 성당과 수산나 피정의 집이 완공되어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공세리성당 바다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아산만에 인접한 공세리 성당은 일찍이 조선 시대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 창고가 있던 곳입니다. 이 창고 건물은 1523년(중종 18년)에 개설됐다가 고종 때 폐지됨으로써, 80칸짜리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897년 구 성당 및 사제관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공세리 본당의 오늘이 있기까지 초대 주임과 3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 활동이 그 바탕을 이루었습니다.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34년간 공세리 본당을 사목하면서 크고 화려함으로 건축 당시 아산 지방의 명물이 된 현재의 성당 건물도 직접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을 불러 지휘 감독하여 1922년도에 완공하였습니다. 성당 한 편에는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까지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순교자 32위를 모신 납골식 순교자 현양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진 곳에는 원래 1867년 정묘년에 순교한 박의서(사바스), 박원서(마르코) 그리고 박익서(본명 미상) 3형제가 나란히 잠들었던 묘소가 있던 곳입니다. 공세리 성지 · 성당은 1995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본당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고, 1998년 성당과 옛 사제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0년 성당과 옛 사제관의 원형 복원공사와 사제관, 수녀원, 예수마음 피정의 집, 성체조배실, 주변 정비 사업을 시작해 2002년 10월 13일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7년 8월에는 3형제 순교자 묘가 있던 곳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아산 공세리 지역 출신 28위 순교자의 유해와 묘석을 봉안하고 그 위에 도자기 테라코타 부조작품 ‘28위 순교자’를 설치하였습니다. 그 후 추가로 발굴된 4위 순교자의 유해 또한 이곳에 모셨습니다. 2008년 9월에는 옛 사제관을 개보수하여 박물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남방제 남방제 성지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 자리이다. 남방제 성지는 그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 아니라, 이곳에 살았던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가운데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은 한 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신앙인이 태어나고 양육되어 영광된 순교의 관까지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에서 순교하지 않았지만, 병인박해(1866년) 당시 순교한 성 조화서 베드로는 이곳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을 키웠다. 또한 교우촌 안에서 함께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15년 수원 도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였다. 신창 남방제에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였고, 1848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다. 하지만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고 한 막달레나가 죽었고,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성 조 베드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선교 활동을 도와 전국의 신자촌으로 모시고 다녔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포졸들에게 잡혀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한국이름 장경일)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 길에 최양업 신부가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친 아주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고, 성 조 베드로가 푸르티에 신부에게 이를 알려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원뿔 모양의 순교자 신앙비. 맨 위에 성 조화서 베드로와 성 조윤호 요셉상이 소나무 좌우에 세워져 있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후 1864년 성 조 베드로는 가족들을 이끌고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옥에 갇힌 성 조 베드로는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고 한다. 전라 감사는 성 조 베드로를 회유하기 위하여 온갖 협박과 함께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여사울성지 여사울 순교사적지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서북 지역을 지칭하는 내포 지역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생가 터가 있는 곳입니다. 상당한 경제력을 지닌 양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존창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선교에 매진할 뿐만 아니라, 가성직제도의 어긋남을 깨달은 뒤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배교를 하기도 했지만 그 뒤 홍산으로 이사한 후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고 전교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그 어느 곳보다 교세가 커졌고 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된 이존창은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이렇듯 여사울은 초기 내포 천주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로서 대전교구의 뿌리가 된 곳입니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순교사적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습니다. 2008년 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하고, 그 해 12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등록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여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순교자 기념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합덕성당 합덕 성당은 충청도 지역 교회의 중심인 내포 지방 한가운데 자리한 유서 깊은 성당으로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설립된 양촌 성당을 모태로 합니다.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으로, 1961년 신합덕 본당을 분가하면서 구합덕 본당으로, 1997년 다시 본래의 이름인 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두 개의 첨탑을 지닌 붉은 벽돌 건물인 합덕 성당은 사방 어디서든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당 구내에는 6.25 때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순교한 페랭 백문필 신부와 그와 함께 잡혀가 순교한 윤복수 라이문도 총회장과 송상원 요한 복사의 순교비와 가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합덕 성당은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에는 성당 구내에 당진시와 함께 합덕 유스호스텔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합덕 유스호스텔은 인근 성지와 연계한 도보순례길 등을 통해 순교신심을 고양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근의 역사 유적과 문화 관광지를 탐방하는 가족 나들이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2010년 12월 본당 설립 12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입구에 합덕 성당 기념비를 세웠고, 2015년 구 사제관 복원공사를 마무리하여 성당 역사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원머리 신평 성당의 관할 구역인 원머리(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는 성당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이미 상당히 큰 교우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 원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가 원머리로 변형된 것으로 박해를 피해온 교우들이 염판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살던 교우촌이었습니다. 이곳에도 박해의 광풍이 몰아쳐 1866년부터 1868년까지 3년여에 걸친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는데, 원머리에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는 무진년(1868년)에 수원 감옥에서 순교했습니다. 사촌지간인 두 형제의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은 외교인 서덕행에 의해 고향 원머리의 박씨 집안 땅에 안장되었다가 1989년 4월 4일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며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신평 성당은 2000년 새 성당을 건축하면서 두 순교자의 묘를 재정비하였고, 2009년 11월 3일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본래 두 순교자가 묻혔던 원머리 순교사적지 묘역으로 유해를 다시 이장했습니다. 그리고 현양비도 수정하여 다시 세우고 묘역 또한 재정비했습니다. 아울러 20여 년간 두 순교자가 모셔져 있던 신평 성당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두 순교자의 믿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두 순교자는 현재 한국교회에서 진행 중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추진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솔뫼성지 솔뫼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1846년 순교)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고,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습니다. 1906년 합덕 성당 주임 크렘프 신부는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해 인근의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고,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백 필립보 신부는 복자 김대건 신부 100주년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 터를 매입하였습니다. 그 후 대전교구는 1976년부터 성지 개발을 본격화해 이듬해 3미터 높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했습니다. 이어 1983년에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습니다. 또한 1998년 7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에 지자체와 함께 2004년 9월 생가를 복원하였고, 2006년 3월에는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축복식을 갖고 성인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장을 마련하였습니다. 2009년부터 주차장 공사를 시작으로 솔뫼 성지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가 성지의 위상에 걸맞게 야외무대와 광장을 조성하고 성지를 집회와 순례, 기념 공간으로 나누어 순례자들이 성지 순례의 참 의미를 묵상하도록 단장했습니다. 노후화된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인 솔뫼 아레나를 건립해 2011년 5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4년 8월 1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만남을 가졌고, 2014년 9월 25일에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황무실 황무실은 당진시와 예산군의 경계에 위치한 얕은 구릉 지대에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전부터 1868년 무진박해까지 신앙공동체가 존속했던 곳입니다. 또한 신리 교우촌과 더불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거주하며 사목활동을 한 내포교회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나 병인박해로 철저히 교우촌이 파괴되고, 이웃한 면천 출신과 합쳐 70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서서히 역사 속에 묻혔습니다. 그러던 중 신합덕 성당 신자들이 황무실에서 사목하다 선종한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소를 찾아 솔뫼 성지처럼 황무실을 선조들의 고향으로 생각해 자주 순례하며 선교사제와 교우들의 묘지를 보살폈습니다. 1970년 4월 30일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 성당으로 이장하면서 황무실은 교우들의 관심에서 다시 멀어지고 돌보지 않는 순교사적지가 되었습니다. 황무실은 2014년 8월 16일 이곳 출신 이보현 프란치스코 순교자의 시복을 계기로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신합덕 본당은 해미에서 순교한 이보현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옛 황무실 교우촌 부지를 매입해 순교자 현양비를 세우고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황무실 성지 및 순교자 현양비 축복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신리성지 신리 성지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머물며 내포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으로 사용된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적지입니다. 이곳에서 다블뤼 주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행적과 교회사를 정리하여 “비망기”(備忘記)를 작성해 파리로 보냄으로써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교회서적을 집필하고 출판함으로써 근대적 출판 인쇄를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주교관 인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갖은 고문 끝에 보령 갈매못에서 성 금요일에 순교하였습니다.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순교사적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대전교구는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본격화하면서 기념성당의 첫 삽을 뜨고 부지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2006년 5월 6일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완공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과 복원된 주교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8년 12월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되었고, 2009년 기념성당 외벽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대형 부조상을 설치하고 다음해 7월말 야외성당(다블뤼 광장) 공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2014년 5월 6일에는 다블뤼 주교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신리 성지 내에 새로 건립한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 봉헌식을 가졌고, 2017년 3월 기념관 지하 2층에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등을 전시한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습니다. 배나드리성지 배나드리 순교사적지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습니다. 이곳은 삽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1.3km)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리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1817년 이곳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갔고,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이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습니다. 대흥봉수산순교성지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에는 예로부터 ‘의좋은 형제’가 살았던 곳으로 유명한 마을이 있다. 밤에 몰래 서로의 논에 볏단을 건네줬다는 우애 깊은 이성만 · 이순 형제의 이야기가 담긴 ‘의좋은형제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또 다른 의좋은 형제를 만날 수 있는 성지가 나온다. 바로 하느님을 향한 신앙을 나누던 ‘의좋은 순교자’, 복자 김정득 베드로와 복자 김광옥 안드레아 형제를 현양하는 대전교구 대흥봉수산 순교성지이다. 성지에 들어서면 넓은 잔디 광장 가운데 두 팔 벌린 성모상이 순례자를 반겨 맞이하고 있다. 성모상이 세워진 받침대는 사형을 집행했던 참수대(斬首臺)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 뒤로 전통방식으로 지어진 인상적인 목조건물이 있다. 기와지붕에 나무와 흙벽으로 이루어진 익숙한 건물이지만, 가까이 가면 일반적인 가옥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문마다 창호 없는 창이 뚫려있고, 지붕 바로 아래 달린 작은 창에는 창살이 쳐있는 옥사(獄舍)이다. 성지 바로 옆에 대흥 동헌이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대흥 관아의 옥사인 대흥 형옥원(刑獄圓)을 재현한 것이다. 형옥원은 죄인들을 가두는 감옥으로 고신(拷訊)과 형벌을 가하던 곳을 이르는 말이다. 옥사에는 3개의 방이 있고, 그 안에는 죄인들이 목에 차는 칼과 곤장을 칠 때 사용했을 형구들이 놓여 있다. 순교자들은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수개월 동안 모진 형벌과 고통을 참아내며 이 작은 공간에서 지내야 했다. 본래 대흥 관아의 옥사는 상중리 296번지 일원 옥담거리에 있었다. 또 사형을 집행하던 처형장은 예당호 내천변에 있었고, 조리돌림 등의 고신이 행해지던 저잣거리는 동서리 173번지 인근에 있었다. 김정신 스테파노(단국대 건축학과) 교수가 설계한 형옥원은 이들을 재현 · 기념하는 공간이다. 형옥원 앞마당은 십자 형태의 거리 모습으로 조성되어 조리돌림, 팔주리 등의 고신과 주리틀기와 큰칼 등의 형벌, 그리고 사형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한 그림과 설명문들이 준비되어 있다. 형옥원 바로 앞에는 형벌을 집행하던 의자와 곤장대도 놓여 있다. 해미순교성지 해미 고을은 조선 중기 내포 일원의 해안 수비를 위한 진영이 있던 곳으로 진영장이 현감을 겸해 지역을 통치하며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1790년에서 1890년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해미 진영은 수많은 천주교인을 국사범으로 처형했는데, 공식적인 박해 외에도 끊임없이 내포 지방의 교우들을 잡아들여 죽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해미 진영의 옥사에는 늘 잡혀 온 교우들로 가득했고, 그들은 매일 서문 밖으로 끌려나가 교수형,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자리개질 등으로 죽어갔습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시체 처리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 생매장이나 수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순교한 이들의 정확한 신원과 행적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단지 수천으로 추정되는 순교자들 중 70여 명만의 이름과 출신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생매장과 수장으로 숨져 간 진둠벙 주변에는 십자가의 길과 노천 성당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을 고문하고 처형했던 해미읍성에는 동헌과 교우들을 가두었던 옥사가 복원되었고, 그 앞에는 고문대로 쓰던 호야나무가 남아 있습니다. 서문 밖 순교성지에는 1956년 서산 성당으로 이전하여 보존하던 자리개 돌다리가 1986년 원위치를 찾아 복원되었다가 2009년 1월 다시 해미 성지 내로 옮겨 보존하고 있고, 1989년에 건립한 순교현양비가 있습니다. 그리고 1935년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에 의해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들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 뒷산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원래의 순교터인 해미 순교탑 앞으로 이장되었습니다. 해미 순교성지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심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 무명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성당 뒤에는 묘지 형태의 유해참배실을 건립했습니다. 유해참배실은 2009년 ‘해미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2008년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 고시된 해미 성지는 2015년까지 지자체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순례지로 개발할 예정입니다. 2014년 8월 17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참가를 위해 해미 성지를 방문하여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을 갖고 해미읍성에서 폐막미사를 집전했습니다. 홍주순교성지 내포 지역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던 홍성읍 한복판에 자리한 홍주성은 그 전체가 순교의 현장입니다. 구체적 순교터로는 목사가 머물던 동헌, 홍주옥, 진영장이 머물던 조양문 앞, 옛 저잣거리, 월계천변 참수터, 생매장 터로 사용되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부근이 있습니다. 홍성읍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조양문인데, 홍주성을 드나들던 동서남북 4개 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동문으로 박해 당시 붙잡혀 온 교우들이 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시체가 되어 성벽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현재 홍주성의 옛 모습 중에서 성벽과 일부 건물이 복원되었고, 원형 복원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순교록과 관변기록 등을 통해 확인된 홍성 순교자는 모두 212명에 달합니다. 그러나 무명 순교자를 감안하면 실제 순교자는 1000여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순교록에 의하면 홍성 순교자는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 많았고 생매장된 순교자도 있었습니다. 2004년 순교성지 발굴이 본격화된 후 2008년 3월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함께 순교비를 세웠습니다. 순교비가 세워진 곳은 홍주읍성 북문 밖을 흐르는 월계천과 조양문 밖을 흐르는 홍성천이 만나는 합수머리 지점으로 1868년 생매장으로 순교한 이들을 비롯해 박해시대 홍주읍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이들의 시신이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입니다. 홍성 본당은 홍성군과 협력해 앞으로 순교비가 세워진 하천부지 일대를 홍주 순교성지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2011년 6월 새 성당을 지어 봉헌하며 홍주 순교자기념성당으로 명명했습니다. 대전교구는 2014년 1월 홍주 순교성지를 전담할 신부를 발령했습니다. 홍주 순교성지는 우선 감옥 앞의 상가 건물을 일부 임대해 아담한 성당과 사무실을 마련해 매일 11시에 미사를 봉헌하고, 성지 신부와 함께 읍내 전역에 흩어져 있는 6곳의 순교터와 증거터를 순례하고 있습니다. 2016년 10월 생매장터에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현재 홍주 순교성지는 20평 남짓한 임대성당이 들어선 건물마저 철거를 앞두고 있어 순례자를 위한 성당 건립이 시급해 관심과 후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갈매못순교성지 서해안 바닷가에 있는 갈매못 순교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 위앵 신부 그리고 황석두 · 장주기 회장 등 다섯 명과 5백여 명의 이름 모를 교우들이 순교한 곳입니다. 1866년 3월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다블뤼 주교는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내포 지방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대원군과의 만남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블뤼 주교는 신자들이 희생을 막기 위해 스스로 체포될 것을 결심하고 다른 동료 선교사들에게도 자수를 권유하는 편지를 보낸 후 붙잡힌 것입니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고 국혼도 가까운 시기여서 서울에서 250여 리 떨어진 보령수영으로 처형지가 옮겨졌습니다. 이들 4명과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 요셉까지 합세하여 모두 다섯 명이 갈매못으로 향하는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성금요일에 순교한 다섯 성인 중 황석두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고향인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넷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했다가 그해 여름 용맹한 교우들에 의해 보령의 현 서짓골 성지에 안장되었고, 이후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복시성 운동이 전개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졌습니다. 고 정규량 신부가 1925년 순교지를 확인하고 이듬해 20평의 땅을 매입해 성지의 기초를 놓은 후, 1975년 9월 대전교구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고 정용택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재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 갈매못 순교성지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85년 9월 다섯 분의 순교성인 기념비와 야외 제단이 세워졌고, 2003년 2월 갈매못 성지본당이 설정되면서부터 성지개발이 본격화되었습니다. 2006년 10월 성지 언덕 위에 처형장인 바닷가를 내려다보는 승리의 성모 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갖고, 2008년 4월에는 기존의 경당과 전시관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수리해 갈매못 순교성지 기념관으로 새로 꾸며 성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2013년 2월에는 갈매못 순교성지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18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청양다락골성지 청양 다락골 성지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자리한 곳입니다.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는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빼내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락골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인 최인주와 그의 어머니가 피난을 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자는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 점점 이웃이 모여옴에 따라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최인주 슬하의 3형제 가운데 셋째가 최경환 성인으로, 그는 1821년 한국에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을 6형제 중 장남으로 얻었습니다. 이들은 박해 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던 중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하였고, 그 후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2003년 대전교구는 청양 다락골 성지에 상주사제를 임명하여 성지 개발 및 보존, 순례자와 인근 교우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토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1월 9일 최경환 성인 일가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 및 선교 정신을 널리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당을 다락골 성지에 건립하여 봉헌하였습니다. 또한 인근에 있는 새터,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 터에 박물관 겸 소성당도 마련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에는 성지 내에 최양업 신부 기념관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수리치골성지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로,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고 주교에 의해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구성되어 공주 지방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 수리치골 교우촌이 확인 개발되기까지는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를 설립한 정행만 신부의 특별한 관심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수차례 답사를 통해 위치를 확인한 정 신부는 1986년부터 인근 부지를 매입하여 성직자들을 위한 성모성심 봉쇄수도원을 1990년에 완공하고 천주성삼상을 제막하였으며, 1993년에는 성모 칠고상을 제작하여 설치하였습니다. 1997년 봉쇄수도원이 다른 곳으로 옮긴 후 수리치골 성모 성지에는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본원이 들어와 한국교회 성모성심 신심의 뿌리를 지키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도앙골성지 현재의 행정 명칭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의 깊은 계곡은 오래전부터 도앙골이라고 일컬어 왔다. 도앙골은 옛 교우촌이 있었던 유서 깊은 순교 사적지로 이존창 루도비코의 전교활동에 의해 교우촌을 이룬 곳이다. ‘도앙골’은 이 마을 계곡 주변에 개복숭아 나무가 많다 하여 생긴 도원곡(桃園谷)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1850년 1월 (혹은 1849년 말)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 바로 전라도를 시작하여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1850년 10월 1일 최양업 신부는 9개월 동안 자신의 사목활동을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고했는데 이 편지의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하고 있다. 이 편지에 신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저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하자 도앙골에 살던 오 요한, 김사범, 김 루카, 김 바오로, 오 시몬 등이 체포되어 공주에서 치명하였다. 또한, 같은 해 도앙골에 살던 김순장 요한은 서짓골 신자들과 함께 갈매못에서 치명하신 다블뤼 성인 등 4위의 유해를 수습하여 서짓골에 안장하기도 하였다. 1890년에 도앙골에 다시 신자들이 모여 공소를 형성하였지만 1970년 공소가 폐쇄되었다. 하지만 2011년 9월 대전교구장 유흥식 라자로 주교의 주례로 ‘기도의 집’ 축복식을 봉헌하고, 같은 해 12월 22일 전임 교구장인 경갑룡 주교의 주례로 ‘탁덕 최양업 시성 기원비’ 제막식이 열렸다. 시성 기원비 옆에는 최양업 신부의 열정적인 사목을 기념하는 제대를 만들어 봉헌하였다. 또한 도앙골 성지 옆에는 삽티 성지가 있어, 두 곳을 잇는 도보순례길이 조성되어 있어 옛날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신앙을 위해 산속에 숨어 어려운 삶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과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해 주지 못해 안타까움을 지녔던 최양업 신부의 모습을 묵상해 보기에 더없이 좋은 성지이다 삽티성지 ‘삽고개’라고도 불리는 삽티(揷峙)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부여군 홍산면 상천리와 내산면 금지리 사이의 경계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부여군과 보령시의 경계를 이루는 월명산과 천보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남쪽과 북쪽 계곡에는 조선시대에 교우들이 숨어 살면서 삽고개를 사이에 두고 연통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삽고개로부터 남쪽으로 흘러내린 계곡에도 교우들이 숨어 살았는데 이곳에 ‘삽티 교우촌’이 있었다. 1850년대에 충북 괴산 연풍에 살던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가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켰는데, 양자인 황천일 요한과 조카인 황기원 안드레아가 이 교우촌에서 살았다. 황석두 루카 성인은 산막골에서부터 가끔 삽티에 찾아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병인박해로 인해 1866년 3월 30일 황석두 루카 성인은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그의 시신을 황천일과 황기원이 수습하여 삽티에 안장하였다. 하지만 1866년 말 황천일과 황기원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을 안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홍산현에 체포되고 서울에 이수되어 무참히 처형당했다. 이로 인해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시신이 안장된 정확한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1922년 시복조사 재판에서 72세의 나이로 황기원의 딸 황 마르타는 “병인년 4월 16일에 나의 백부가 가서 시체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홍산 삽티에 묻었습니다. 지금은 자손이 없기 때문에 가더라도 찾지 못합니다.”라고 증언하였다. 황 마르타의 증언 이후 이곳 삽티의 황석두 루카 성인 안장묘를 찾아 돌보거나 옮긴 기록을 찾을 수는 없다. 1962년 삽티 일대를 개간 작업하던 외교인들이 스러진 묘터에 묻혀 있는 항아리 속에서 십자고상과 성모상과 묵주 등 성물을 발굴했다. 그 발굴지점을 교회사학자들은 황석두 성인의 안장지라 신빙하고 있다. 하지만 그 안장 신빙 지점은 1990년대에 타지인들의 문중묘역으로 바뀌었다. 당시 발견된 유물들은 현재 서울 절두산 성지의 순교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2012년 윤종관 신부는 성물 발굴지에서 분할된 지번의 산지를 매입하고 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2016년 성지 조성을 시작하였다. 2018년 부여군은 성물 발굴지점으로부터 100미터 거리의 봉우리에 십자가를 세우고 황석두 성인의 안장기념 자리로 표시했다. 십자가를 향하여 순례자들이 기도하는 이 자리를 ‘황석원(黃錫園)’이라 칭하고 황석두 성인 안장 묘원을 꾸몄다. 또한 묘원 안에 대전교구의 역사를 함께하는 제대를 안치하여 ‘황석정(黃錫亭)’을 건립했고, 제대 뒤 비석에는 성인의 신앙 고백인 “나는 천당 과거에 급제했습니다.”, “비록 만 번을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를 새겨 놓았다. 현재 삽티 성지와 월명산 정상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도앙골 성지’를 잇는 도보 순례길이 마련되어 있어, 숨죽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선조들의 마음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서짓골성지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남도 보령시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 · 위앵 신부, 황석두 · 장주기 회장이 순교한 후 황석두 성인의 유해는 일가에 의해 홍산 삽티에 안장되었고, 나머지 네 성인의 유해는 서짓골에 사는 이화만 바오로와 그의 아들들, 그리고 용감한 도앙골 교우촌 신자들의 도움으로 처형장에서 오포리 야산의 두 번째 무덤을 거쳐 그해 여름 배편을 이용해 서짓골의 담배 밭에 이장하여 모셨습니다. 네 순교성인의 유해는 1882년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졌다가 1894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1900년 명동 성당 지하묘역을 거쳐 1967년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었습니다. 서짓골 성지는 15년 6개월 동안 네 순교성인이 머문 세 번째 무덤으로 순교자들의 피와 살, 잔뼈들이 진토가 된 거룩한 순교사적지입니다. 서짓골은 부여 금사리 본당의 고 정규량 레오 신부가 1925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식을 기념하며 그 위치를 확인하였지만 이후 교회사에서 잊힌 땅이 되었다가 2007년부터 부여 만수리 공소에 윤종관 신부가 상주하면서 다블뤼 주교의 주 사목지이자 수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하부 내포 지역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012년 1월 대전교구에서 하부 내포 지역을 성지로 선포하고 윤종관 신부를 전담으로 임명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성역화가 이루어져 2013년 10월 서짓골 성지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보령호 옆 도로변에 조성된 성지에는 네 순교성인의 무덤을 형상화한 야외제대와 순교자 현양비, 정자와 편의시설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지석리성지 부여 지석리는 성 손선지 베드로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가 태어난 고향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 치명한 두 성인의 유해는 현재 천호 성지에 묻혀 있습니다. 두 순교자는 1984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당시 지석리에는 손선지 성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는데, 가난한 생활 가운데서도 손선지 성인의 시성비라도 세워 달라며 홍산 성당에 밭을 기증했다고 합니다. 홍산 성당에서는 두 성인의 생가터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자 동네 땅 일부를 매입해 1988년 두 성인의 출생 기념비와 50여명 정도가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야외제대와 기념비 안내문을 세웠습니다. 2014년에는 두 성인의 출생기념비를 새로 세우고 성지 표지석과 약간의 주차공간을 마련하는 등 순교사적지 주변 조경공사를 마무리해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산막골작은재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자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힌 무덤 터가 2010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같은 사실은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가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자료집을 통해 밝혀졌다. 자료집에 따르면 천방산 산막골(현 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은 신앙 선조들이 1839년 기해박해 이후 군란을 피해 인적 없는 산간벽지에 숨어 신앙공동체를 이루며 살았던 곳이자 다블뤼 주교와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밝혀졌다. 또한 이곳은 순교자들이 심한 형벌을 받고 피를 흘렸던 점으로 보아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곳은 황석두 루카 성인 일가가 충청북도 연풍에서 이주해 와 1866년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참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8번지의 천방산 기슭은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와 판교면 금덕리의 작은재 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살다간 숱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였다. 하지만 1994년 산림도로 개설과 함께 줄무덤 터는 콘크리트에 묻히고 말았으며, 당시 공사현장에서 숱한 유골과 함께 발굴된 십자가와 묵주 등 성물도 연고자가 없어 인근에 다시 묻혔으나 그 위치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대전교구 서천 본당 주임으로 정성용 신부가 부임하면서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박해시대 서천 지역 신앙 선조들의 숭고한 터전들이 하나씩 밝혀지게 되었다. 서천 본당은 2010년 11월 천방산 고갯마루에서 유흥식 주교 주례로 ‘산막골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미사’를 봉헌하고, 수암리의 독뫼 공소 터에 세워진 성모동산과 공소 터에서 작은재를 오르는 산길에 세워진 십자가의 길 14처에 대한 축복식도 가졌다. 또한 독뫼 공소와 작은재 공소 터에 기념비를 세워 교우촌 순례길을 돕고 있으며, 작은재 줄무덤 터에도 기념비를 세워 천주교 백색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2018년 10월에는 산막골과 작은재 순교사적지 재단장을 기념해 미사를 봉헌하고, 두 순교사적지를 잇는 옛길을 순례길로 복원하는 있는 중이다. 진산성지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해있는 진산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참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이 발생한 곳입니다.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은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사회 안에서 패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고, 친척과 이웃들의 고발로 인해 윤지충과 권상연은 체포되어 그해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되어 순교했습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들이 성장한 곳에 위치한 지방리 공소는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이후 신자들의 활동이 잠시 주춤하였으나,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다 피난 온 신자들을 중심으로 재개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지방리 출신의 김영삼이, 1877년에는 김영삼의 동생인 김 사도 요한이, 1878년에는 김춘삼 사도 요한이 순교하였습니다. 순교와 오랜 믿음의 전통을 지닌 지방리 공소는 1963년 행정개편으로 전라북도에서 충청남도로 편입되었고, 1980년 전주교구에서 대전교구로 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2009년 공소에서 성지성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공주 황새바위 공주는 한국 천주교회가 안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땅이요 충남 지역 신앙의 요람입니다. 공주에는 일찍부터 충청도를 관할하는 관찰사와 공주 감영이 있었고, 충청도 각지에서 잡혀 온 천주교인들은 공주 감영으로 이송돼 배교를 강요당하고 이를 거부할 때에는 ‘황새바위’라고 불리는 곳에서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공주 황새바위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의 출신지는 충청도, 전라도, 경기도, 한양 등 매우 다양하며, 그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248명에 이릅니다. 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순교자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손자선 성인과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내포 지방의 사도’ 이존창이 있습니다. 현재 공산성을 마주하고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는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해 공주 교동 본당에서 세운 13.8미터 높이의 순교탑이 서 있고, 공주의 순교자 248위의 명패가 새겨진 돌무덤 형태의 경당이 있습니다. 또한 무덤경당 앞 순교자 광장에는 12개의 빛돌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비석이자 12사도를 상징합니다. 2002년 11월 성지 입구에 미사와 강연 등을 위해 대경당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고, 2008년 12월에는 황새바위 순교성지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등록되었습니다. 2009년 대경당을 보수해 성당을 짓고, 2012년 1차 종합개발을 시행해 순교자 광장과 야외성당을 조성하고 무덤경당을 원래 설계대로 재건축해 그해 10월 20일 축복식을 갖는 등 성지의 면모를 일신하였습니다. 이어 2014년 순교탑을 보수하고, 2015년 빛의 길 · 묵주기도 길 · 십자가의 길 · 십자가 언덕 등을 조성하고, 아담한 크기의 부활성당도 건립했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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