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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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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의정부교구 → 2박3일 인천교구, 의정부교구 2박3일 거룩한 성지순례 이승훈 베드로 군교자의 영원한 안식처 남북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민족화해와 일치의 못자리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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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골 이승훈 베드로묘 반주골에는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자 창립 선조의 한 명인 이승훈 베드로의 묘와 장남 이택규와 3남 이신규 마티아 순교자의 묘가 있습니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을 단념한 그는 당대의 명문가인 마재의 정씨 가문 정약용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그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대의 석학들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에 참석하던 중 이벽의 권유로 1783년 말 동지사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후 교리서와 성물 등을 갖고 귀국해 강학회 동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명례방 집회를 열며 가성직제도를 주도하는 등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과 조상 제사 문제, 부모의 적극적인 반대 등으로 잠시 교회를 떠나기도 했으나, 다시 돌아와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 네거리 처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반주골에 안장되었던 이승훈의 유해는 천진암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 묘역으로 이장되어 정약종, 권철신 · 일신 형제, 이벽 옆에 나란히 모셔졌습니다. 반주골의 이승훈 베드로 묘는 2011년 12월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인천교구는 2014년 1월 인천시와 협력하여 묘역 일대를 역사문화기념관과 순례길 등을 갖춘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현재 이승훈 베드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 진행 중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시복 대상자인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제물진두 순교성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제물진두는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오페르트의 무덤 도굴사건 그리고 서양세력의 침공과 관련해 천주교 신자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척사 의식을 고양하려는 정부에 의해 인천 지역 최대 순교지가 되었습니다. 1868년 4월,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의 이모인 김씨와 남편 손 넙적이 베드로, 사위 백치문 사도 요한,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1871년 5월에는 이승훈의 증손자 이연구와 이균구 형제, 이승훈의 손자 이재겸의 부인 정씨와 그의 손자 이명현, 신자로 추정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체포되어 이곳에서 함께 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성 김대건 신부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하여 1년여간 조선교회의 사정을 둘러본 후, 1845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위해 작은 목선을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1888년 7월 22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4명의 수녀가 이곳 제물포항을 통해 순교자의 땅인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곳입니다. 인천교구는 제물진두 위치 규명에 이어 2011년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관 옆 대지를 매입해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역화를 추진해 2014년 5월 제물진두 순교기념 경당 축복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제물진두 순교성지에 건립된 15m 높이의 경당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하느님께서 순교자들을 감싸는 두 손 모양을 형상화했습니다. 답동 주교좌성당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이전으로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습니다. 답동 본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대지를 물색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는 페낭 신학교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빌렘 신부에게 새 본당을 맡겼고, 빌렘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제물포에 진출하여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9년 7월 1일이었습니다. 제물포 본당(현 답동 본당)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는 이듬해 3천여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성당 건축을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전임되었고, 이어 부임한 르비엘 신부가 추가로 대지를 매입하여 1891년 임시 성당 겸 경리부를 건축했습니다. 1893년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마라발 신부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에게 성당 설계도를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부원이 설립되어 보육과 무료진료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성당 건립 공사는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정초식, 1897년 7월 4일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췄는데,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에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마라발 신부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박문소학교’(현 박문 초등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부터 답동 본당에 큰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1961년 6월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고 맥노튼(나길모)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습니다. 2001년 9월 박문 초등학교를 연수구로 이전하고 이를 리모델링하여 2002년 1월 새 교구청사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2009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성당 성역화 작업을 전개하여 성당 마당을 공원화하고, 정부 지원을 받아 성당 보수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2010년 8월에는 인천시 중구와 함께 답동 성당 일대에 대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통해 성지를 보존하고 지역주민들과 역사 ·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성모 순례지 인천교구는 인천시 동구 송림동 교구청 앞마당에 성모당을 짓고, 교구장 정신철 주교 주례로 봉헌 미사를 거행했다. 교구 사제단과 수도자, 신자 3500여 명이 참여했다. 인천교구 성모당은 세계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를 요청한 파티마 성모를 모티브로, 돔 형태의 가운데 성모당을 중심으로 두 팔을 벌린 형태로 지어졌다. 연면적 469.87㎡, 높이 11.55m 규모다. 가운데 성모당에는 파티마에서 제작한 약 2.3m 높이의 파티마 성모상이 안치됐다. 실내 경당과 상설 고해소, 휴식 공간인 ‘로사 마당’도 함께 마련됐다. 인천교구는 ‘신자들이 편하게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계획했던 전임교구장 고(故) 최기산 주교의 뜻을 이어받아 3년 만에 성모당을 완성했다. 지난해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을 맞아 공사에 착수했으며, 성모당 완공을 위해 지난 5월부터 교구 126개 본당을 순회하며 미사를 봉헌했다. 성체 순례지 김포 지역의 전교 역사는 1900년경 시작되어 1910년 김포읍 걸포리에 행주 본당 걸포리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1946년 11월 행주 본당에서 분리되어 걸포리 본당으로 승격된 후 발전 가능성이 큰 김포읍에 성당부지를 마련해 성당 건립에 들어갔으나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6년 12월 신인식 신부와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석조 성당을 완공하여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본당명은 1949년에 걸포리에서 김포로 변경했습니다. 1961년 인천대목구의 설립으로 메리놀 외방전교회가 사목을 담당하여 활발한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후 교구 사제들의 노력으로 신자 수가 증가하자 본당 설립 50주년을 기념해 1999년 석조 성당 아래 새 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이로써 신구 성당이 공존하며 과거와 현재를 통시에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6년 60주년을 기념해 교육관을 신축하고 옛 석조 성당을 대대적으로 수선하여 피정 공간으로 꾸미고 야외동산에는 십자가의 길도 새로 조성했습니다. 2013년에는 김포 지역 천주교의 모태로서 한국전쟁 이후 건축된 석조 성당을 대표하는 건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5년 11월 1일 인천교구는 한국교회 최초로 김포 성당의 옛 석조 성당을 성체 성지로 선포하고 미사와 교육을 담당할 전담 사제를 발령했습니다.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 100여 년의 박해시대를 거친 한국 천주교회에는 적게는 1만 명, 많게는 3만 명의 순교자들이 있지만 이름 정도라도 알려진 순교자는 약 1,000여 명에 불과합니다. 대부분은 이름조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2002년 인천교구는 강화도의 ‘바다의 별 청소년 수련원’ 내에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을 조성해 한국의 순교자들, 특히 무명 순교자들에게 봉헌하였습니다. 현양동산에는 성모당, 십자가의 길, 순교자 현양당, 전국 유명 성지의 상징물이 있는 순교자의 길, 무명 순교자상, 무명 순교자 현양탑, 묵주 연못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2005년 11월 3일 무명관 2층에 ‘일만위 순교자 기념성당’이 마련되었고, 성당 내에는 홀로 기도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개인 성체조배실도 만들었습니다. 2007년 6월에는 ‘주님 위로의 동산’과 ‘순교자의 십자가 길’이 조성되었고, 2007년 10월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남종삼 요한 성인의 유해 일부를 모신 ‘성 남종삼 기념관’도 건립했습니다. 2018년 11월에는 침묵 순례를 돕기 위해 혼자 걷는 묵주기도 4 신비길도 조성해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한국 일만위 순교자 현양동산은 ‘순교자를 위한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을 위한 곳입니다. 순교자들의 신앙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는 ‘길’을 찾고 배우는 ‘신앙의 학교’이며,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누구나 편하게 찾아와 기도하고 쉬어갈 수 있는 ‘삶의 성지’입니다. 갑곶 순교성지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및 문화 유적입니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를 초래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으로 강화대교 서쪽 끝에 있는 갑곶돈대에서부터 박해의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갑곶 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가 이슬로 사라졌고, 또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당한 강화에 살던 신자 우윤집, 최순복, 박상손 등이 갑곶진두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였습니다. 이후 1999년 11월 성지를 새로 단장하고 2001년 7월 제대 및 십자가의 길과 성모상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그해 9월 20일에는 신미양요 때 순교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순교자비를 세우고,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며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 증거자의 유해 안장식을 가졌습니다. 2005년 4월에는 기존의 낡은 경당을 재단장해서 성당 축복식을 거행하고 김대건과 남종삼 성인의 유해 일부를 모셨습니다. 성당 아래에는 넓은 야외 미사 장소와 묵주기도 길, 쉼터 등을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습니다. 2011년에는 인천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갑곶 성지와 연결하여 인천교구 50주년 기념 영성센터 건립을 추진하여 2012년 11월 준공하고 이듬해 12월 축복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로써 100여 명의 단체 피정이 가능한 숙박 시설과 새 성당, 강당 등을 갖추었습니다. 진문영 순교성지 진무영은 숙종 때 해안 방어를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강화도와 그 주변 군사들을 함께 엮어 창설한 군영이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를 계기로 그 기능이 확대되었고, 양인과 내통한 혐의로 1868년 음력 5월 장치선, 최영준, 박 서방, 조 서방 등이 순교하면서 천주교 신자에 대한 처형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장치선과 최영준은 리델 신부를 안전하게 중국으로 피신시키고, 박해의 상황을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고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고자 했습니다. 현재 강화 성당 구내에 진무영 순교성지가 조성되어 있으나 진무영 터가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옛 강화 농협 자리에 있는 은혜 교회부터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강화 성당까지를 진무영 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강화 본당은 2004년 성당 구내에 성지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 참회와 속죄의 성당의 시작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다.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 공간이 필요하다는 김 추기경의 제안에 실향민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신자들의 모임 ‘천주교 한민족복음화추진본부(회장 봉두완, 담당 김병일 신부)가 움직였다. 1996년 5월 통일을 위한 피정센터 설립에 쓰일 목적으로 통일동산의 종교 부지를 매입한 한민족복음화추진본부는 이듬해 서울대교구에 지정 기탁을 했고, 남북한 통일을 위한 연구 및 교육 등의 목적으로 사용해주길 당부했다. 당시 천주교 한민족복음화추진본부 회장이자 황해도 수안 출신인 봉두완(다윗)씨는 “1000원 남짓한 쌈짓돈을 정성껏 헌금한 할머니부터 몇 억 가까운 금액을 선뜻 기부한 기업인 등 신자들이 참회와 속죄의 성당의 주춧돌이 됐다”며 “더불어 김 추기경의 지지와 황해도 출신 김병일 신부의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 건립이 시작된 것은 2004년, 정진석 추기경이 교구 시노드 후속 교구장교서 ‘희망을 안고 하느님께’를 통해 “민족화해센터를 설립할 것”을 밝힌 이후다. 교구는 ‘민족화해센터’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 본격적인 공사 준비를 해왔다. 정 추기경은 또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의 예수성심대성당을 ‘참회와 속죄의 성당’ 모델로 삼았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서로 형제들을 죽인 죄를 참회하는 뜻에서 지어진 예수성심대성당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으로 같은 민족이 서로 죽이고 죽인 죄를 회개하자는 뜻에서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신자들의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세워졌다는 점이다. 이북 출신 실향민 할머니들이 평생 아껴 모은 3억 원을 전달하는 한편, 폐휴지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던 할머니도 몇 달 분의 판매대금을 아낌없이 봉헌했다. 평양교구 사제단과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도회 등 사제와 수도자들의 도움도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성금 5억 원과 서울대교구 지원금 30억 원이 바탕이 돼 지금의 참회와 속죄의 성당이 완공될 수 있었다. 갈곡리 성당 갈곡리는 옛날부터 칡이 많아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렸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습니다. 홍천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칠울 인근 우골에 정착해 살다가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칠울로 이주해 왔습니다.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 일대에 교우들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고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는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차츰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갈곡리 성당은 1898년 약현(현 중림동약현) 본당 칠울 공소로 설립되어, 1901년 송도(개성) 본당 공소, 1923년 신암리 본당 공소, 1934년 덕정리 본당 공소, 1947년 의정부 본당 공소, 1963년 법원리 본당 공소, 2018년 법원리 본당에서 분리해 준본당으로 신설되었습니다. 1951년 6.25 전쟁 중 1936년에 마련한 공소 강당이 소실되자 당시 미군 해병대 군종이었던 에드워드 마 신부의 도움을 받아 1955년 현재의 의정부 주교좌성당을 본뜬 공소 성당을 건립했습니다. 2008년에는 기존의 낡은 칠울 강당을 개보수하여 단체 피정이나 연수가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의정부교구는 2018년 8월 갈곡리 공소를 법원리 본당에서 분리해 준본당으로 신설하고, 갈곡리 출신으로 1950년 공산당에 의해 순교한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순교자 기념 순례지로 지정했습니다. 현재 김치호 신부는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의 한 명으로, 김정숙 수녀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의 한 명으로 현재 시복절차가 진행중입니다. 신암리 성당 신암리는 구한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와 도자기를 굽던 교우촌의 하나로 의정부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된 곳입니다. 1909년 개성 본당의 관할 공소로 설립된 후 1925년 3월 본당으로 승격되어 1927년 5월 최문식 초대 주임신부가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본당의 여건이 어려워 1930년 본당이 폐지되고 행주 본당의 공소가 되었습니다. 1935년 덕정리 본당 공소가 되었다가, 1945년 덕정리 본당이 의정부로 이전하고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그 관할 공소가 되었습니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초토화되었으나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신암리 신자들은 영국 군인들의 도움을 얻어 공소를 재건했습니다. 1959년 동두천 본당 공소로 편입되어 신앙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2008년 9월 12일 준본당으로 승격하는 등 다난한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2005년 3월 30일 본당 승격 80주년을 맞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도시 지역 신자들의 피정 공간으로 공소를 개방하는 등 공소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에 나섰습니다. 2008년 10월 5일 신암리가 고향인 서울대교구의 이경훈 신부가 공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은인들의 도움으로 새 성당과 순교자 박 다미아노의 집(교육관 및 사제관) 건물을 새로 건립하여 이곳 출신 순교자로 전해지는 박 다미아노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 8월 22일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새 성당의 성상 및 성물 등을 모두 갖추고 2015년 10월 준공 감사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18년 8월에는 신암리 태생으로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인 이춘근 라우렌시오 순교자 기념 순례지로 지정되었습니다. 양주 순교성지 박해시대 경기도 북부 지역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으나 박해가 진정되고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재건 속도가 빨라져 1830년대 초 고양(高陽) 지역에선 70-90명 규모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양주 관아는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졌습니다. “치명일기”에 의하면 바로 이곳에서 홍성원 아우구스티노, 김윤오 요한과 권 마르타 부부, 김 마리아, 박 서방 등 5명이 순교했습니다. 양주 관아는 1506년 현재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현 의정부시 의정부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간 양주목(楊州牧)을 관할한 행정관청이었습니다. 양주시는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매학당)의 복원을 시작으로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반영하여 2017년 동헌부의 부속건물과 내아를 복원했습니다. 의정부교구 순교자공경위원회는 2008년 ‘경기 북부 지역과 한국 천주교’ 심포지엄을 통해 “치명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양주 관아 일대의 치명지로 추정되는 곳을 찾았고, 이를 근거로 양주 향교 앞의 순교터를 매입하여, 2016년 5월 양주 순교터를 의정부교구 내 첫 순교성지로 선포하며 현양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의정부교구는 2017년부터 전담사제를 임명해 매일미사를 봉헌하며 양주 순교성지의 성역화와 순교자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묘소 장흥면 울대리의 의령 남씨 가족 묘소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 성인과 공주에서 순교한 부친 남상교, 유배지에서 치명한 아내 이조이와 막내아들 남규희의 묘가 있습니다. 남종삼은 103위 한국 성인 중 가장 높은 벼슬에 오른 분으로 부친 남상교의 영향으로 일찍이 천주교 교리를 알고 입교한 것으로 보입니다. 승지까지 오른 남종삼은 청백리로 의덕과 겸손의 가난한 생활을 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관리들의 시기와 제사 문제로 신앙과 관직이 양립할 수 없게 되자 관직을 내놓고 부친이 은거하던 묘재로 내려갔습니다. 1863년 말경 대원군이 정권을 잡으면서 남종삼은 좌승지로 발탁되었고, 당시 수시로 러시아가 침범해 통상을 요구하자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我策)’이라 하여 국내의 프랑스 주교를 통해 한불수교를 맺고 서양의 세력을 이용해 러시아를 물리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묘재로 가서 부친의 준엄한 가르침을 듣고, 치명을 각오하고 배론 신학당을 찾아 성사를 받은 후 한양으로 가던 중 체포되었습니다. 의금부로 압송된 남종삼은 병인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후 남종삼의 시신은 홍봉주의 시신과 함께 용산 왜고개에 매장되었다가 1909년 유해가 발굴되어 명동 성당에 안치되었고, 시복을 계기로 1967년 10월 다시 절두산 성지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습니다. 이때 성인의 유해 일부를 가족 묘소인 울대리에 모셔 안장했습니다. 2004년 12월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묘소를 성역화하기 위해 묘역 안내 표지석을 설치했고, 2010년 의정부교구는 성인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 본받기 위한 ‘순교자의 길’ 순례길을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습니다. 2018년 8월에는 묘역이 속한 송추 성당을 성 남종삼 요한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순례지로 지정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남종삼 성인 묘비 제막식을 거행했습니다. 의정부 주교좌성당 의정부 주교좌성당은 1945년 12월 덕정리 본당을 이전하며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설립되었고, 1980년 의정부 4동(현 의정부 1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의정부 2동 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2004년 6월 24일 서울대교구에서 의정부교구가 분리 · 신설되면서 주교좌 의정부 본당으로 명칭을 다시 변경하였습니다. 1953년 이계광 신부는 성당으로 쓰던 한옥이 소실되자 미군 1군단과 군종신부의 도움으로 1953년 11월 현 사적지 성당을, 다음 해 3월 유치원 건물을 완공하였습니다. 1957년 건립된 성모병원은 1976년 가톨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등록돼 경기도 북부지역의 유일한 종합병원이자 최대 규모의 병원으로 발전했습니다. 1995년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기념 미사와 “의정부 본당 50년사”를 간행했고, 2002년 1월 성당 건물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의정부 본당은 동두천, 의정부 1동, 용현동, 호원동, 신곡 1동 본당 등 의정부 지역 본당들을 속속 분가하면서 ‘의정부의 어머니 본당’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의정부 성당은 2002년 3월 사적지 성당 뒤편에 협소한 기존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 및 유치원 건물 착공식을 가져 2003년 8월 31일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화강석으로 처리한 외양은 옛 사적지 성당의 석조와 무난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2012년에는 사적지 성당 내부를 말끔하게 새로 단장했습니다.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습니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은 어렵게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되었고,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묘를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토시)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로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면서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러운 일생을 선택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령이 내려지자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제천 배론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는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박해 상황을 기록하던 중, 그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은 붓으로 명주 천에 적었는데,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가 발각되어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그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의정부교구는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 사패산을 넘어 남종삼 성인 묘역과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해 송추 성당을 중심으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순례와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2018년 8월에는 송추 성당을 남종삼 요한 성인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순례지로 지정했습니다. 고양 행주성당 행주 성당은 1899년경 약현 본당 관할로 설립된 행주 공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행주 포구는 한강을 통한 수로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거주 인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자수의 증가로 1909년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초대 김원영 신부는 1910년 8월에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고, 1922년 성당을 증축하면서 사제관도 신축하였습니다.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던 1942년 한때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8년 본당으로 부활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시화로 신자수가 감소하자 1957년 수색동으로 성당을 이전하고 본당 이름을 ‘수색동 본당’으로 바꾸면서 행주 본당은 재차 공소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82년 설립된 능곡 본당 공소로 있다가 2004년 의정부교구 설립과 함께 그해 11월 18일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행주 성당은 2009년 5월 31일 ‘본당 승격 100주년 기념미사’와 ‘100주년 역사 기념관’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3년여의 공사를 통해 100주년 기념관 성모의 집은 본당의 역사를 느끼며 쉬어갈 수 있는 쉼터와 유물전시실, 교구사제 숙소 등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910년 소박한 한옥 형태로 지어진 행주 성당은 1928년 인근의 현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기존의 자재를 대부분 재활용했고, 1949년 증축하면서 기록한 자료 등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특히 건물의 뼈대를 구성하는 목조가구의 경우 최초 건립 부분과 증축 부분이 잘 남아 있는 대표적 한식 목조 건축물로 평가되어 2010년 2월 19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10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건물도 낡고 변형되어 2013년부터 복원작업을 추진해, 역사적 고증과 자문을 거쳐 100년 전의 모습을 복원해 2015년 12월 복원 감사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 1월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를 맺고 특별 전대사 순례지로 선정되었고, 이를 기념해 그해 10월 성모당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행주 성당은 또한 근현대 순교자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 이순성 안드레아 신부, 윤의병 바오로 신부가 주임신부로 사목하던 곳으로 순교자들의 손길과 땀이 배어 있는 순례지이기도 합니다. 남양주 마재성가정성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한 마재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신앙의 태동지입니다. 4형제 중 정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오른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바로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당쟁의 와중에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스스로 천주교를 떠났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고, 18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실학을 집대성했지만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하며 형 정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데 대해 부끄러움을 표시했습니다. 긴 유배 생활 중 신심을 되찾은 정약용은 유배에서 돌아온 후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보속의 삶을 살다가 여항덕 파치피코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재는 천진암 주어사, 양근 등과 지척으로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기틀을 다진 곳입니다. 남양주시는 1999년부터 ‘다산 문화의 거리’를 본격적으로 개발해 여유당 생가를 복원하고 실학 박물관을 건립하는 등 주변 환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의정부교구 또한 2006년 전담사제 임명하고 마재 성지에 대한 성역화에 나서 2007년 새로 마련한 현 부지에 전통 한옥 양식의 도마 성당과 명례방 등을 완공하였고, 이어 2008년 9월 28일 마재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2012년 2월 마재성지 본당 신설과 2014년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의 시복으로 가족 모두가 시복 시성된 것을 계기로 2년간 성가정 성지 조성작업을 실시해 2017년 5월 27일 마재 성가정 성지 선포 및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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