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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의 의미 소그룹 맞춤순례 20인 이상 순례 167곳 완주 순례 자유 순례 일반여행

소그룹 맞춤순례

수원,청주,안동교구 4박5일

한국 천추교회 태동 홍유한 우곡성지를 비롯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 4박5일

수원, 청주, 안동 교구 내 포함된 모든 성지를 기도하며 순례하는 일정

상품기본정보

여행도시 교구별 거룩한 땅을 향하여 - 수원,청주,안동교구 4박5일
여행기간 5일
교통편

4인 ~ 8인 전용 차량

출발일 상시출발

도착일 상시출발

호텔/객실 2인 ~4인 1실 호텔 or 리조트 or 동급
미팅장소 출발 1주일전 확정해 드립니다.
대표요금 성인 ₩ 630,000 ~
모객현황

상품가격

요금구분 가격 예약
2인 ~4인 기준 금액 숙소 확정에 따라 변동됨 0 예약하기

상품특전

►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출발 부터 성지 관련 안내는 물론 차량 운영이 가능한 드라이브 스루 가이드가 함께하며 편안하게 모십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

►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 석식) 3일차 (조,중,석식)4일차(조,중,석식)5일차(조,중식)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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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포함사항

►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특이사항

 

►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쇼핑센터

NO쇼핑

일정표

 

남한산성성지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제 순교자는 2~3백 명으로 추산)이 순교한 곳입니다. 현재의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때 중건한 것으로 후금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2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두 군데로 서쪽으로는 성남 방면, 동쪽으로는 광주 방면으로 연결됩니다.

치명터는 동문에 자리하고 있는데,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이 죽어서는 물이 빠지도록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습니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성 로터리에는 천주교인들을 수감했던 옥터와 처형터가 있습니다.

수원교구는 1998년 남한산성을 성지로 선포하고 공영주차장 인근 작은 개천 옆에 마련한 부지에 순교자현양비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고, 성당 뒤편 산에는 야외미사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순교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2015년 4월에는 기존의 협소한 성당을 대신할 한옥 형태의 새 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구산성지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이자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교우촌인 구산 마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산에서 태어난 김성우 성인은 36세에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성인은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기도 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고, 1840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성인은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 암브로시오 등에 의해 수습되어 고향에 안장되었습니다. 1927년 5월 30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와 명동 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 지하의 유해안치실에 모셔졌습니다. 현재 구산 성지 순교자 묘역에는 김성우 성인과 가족 그리고 구산 출신 순교자 등 9위의 무덤이 진묘와 의묘 형태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1984년 5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천진암 성지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습니다. 권철신 ·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에게 그리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들에게 세례를 주고,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켜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는 오랫동안 잊혀오다가 1960년에 와서야 그 가치가 드러나 1980년 천진암 일대 부지를 매입하여 그 초입에 가르멜 수녀원을 설립하고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를 이벽의 묘 옆으로 이장해 창립 선조 묘역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성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정하상과 유진길 성인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성직자 영입 운동과 조선 독립교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순교성인들입니다.

 

1982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이 설립되었고, 한민족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 공사가 시작되어 현재 기초공사를 진행 중입니다. 그 외에도 1994년 성지 입구에 광암 이벽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광암 성당이 세워졌고, 1999년에는 성모경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1992년 박물관 건립 인준 후 1995년 기공식을 갖고 시작한 천진암 박물관은 2011년 건물 공사를 마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습니다. 2013년 6월에는 22m 높이의 세계평화의 성모상을 세우고 축복식을 가졌고, 2016년 10월에 기존의 성모 경당을 리모델링하여 성모 성당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양근성지

양근(楊根)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남한강 변에 폭우와 홍수로부터 제방의 붕괴를 막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던 데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권철신과 권일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과 유항검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조과, 만과, 성로신공 기도 등을 바치며 천주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가성직제도 하에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습니다.

 

양근 성지는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이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습니다. 또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 윤점혜, 권상문이 참수형으로 순교한 곳입니다. 그 외에도 조용삼, 홍익만이 순교한 곳으로 이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졌던 곳입니다.

 

단내성가정성지

단내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박해의 회오리가 단천리 교우촌에 몰아쳤을 때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고,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에는 마을 뒤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갔고,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병든 작은 할아버지를 모시고자 자진하여 잡혀갔습니다. 배교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그들은 그해 말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양묵 베드로의 시신은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단내 성가정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의 성인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특히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한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5위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에서는 2003년 기념성당과 5위 성인 순교비를 세우고, 지속적인 성지 개발과 성가정의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농성지

어농 성지에는 한국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의 묘가 있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던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순교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유일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하여 후손을 찾지 못하던 중 1987년에 한 후손이 나타나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과 윤관수, 그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와 윤운혜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 등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 해 6월 28일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어농 성지는 윤유일 일가 묘소를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해 1999년 예수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고, 2002년에는 사제관과 성당을 마련했습니다. 그 해 8월 13일 최덕기 주교에 의해 ‘을묘 ·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성지’로 선포된 어농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다가 치명한 을묘박해 3위 순교자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6년 동안 조선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 14위를 현양하고 있습니다. 이들 17위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한편 어농 성지는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순교 영성과 성소를 불어넣어 주는 청소년 성지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음성 감곡매괴성모순례성지

감곡 본당은 1896년 ‘장호원 본당’이란 명칭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장호원 지역은 본래 부엉골 본당 관할로 1894년 부임한 부이용(Camillus Bouillon) 신부는 본당 위치가 적당치 않아 1896년 장호원의 매산(玫山) 언덕에 있는 한옥을 매입하였습니다. 이 집은 본래 임오군란 때 민비(閔妃)가 일시 피신하기도 했던 민응식(閔應植)의 한옥으로 1895년 말 의병과 일본군의 전쟁으로 불타 버린 상태였습니다. 부이용 신부는 1896년 9월 17일 장호원으로의 본당 이전을 결행하였고, 부엉골 본당은 폐지되었습니다.

 

신자수의 증가와 함께 부이용 신부는 1904년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 성당을 완공하였고, 교육 사업에도 눈을 돌려 1907년 매괴학당, 1912년 여학교를 설립하여 현 매괴고등학교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1914년부터 매산에서 성체거동을 시작하여 매년 거행하고 있고, 1930년 10월 7일 현재의 고딕식 연와조 성당을 신축하였습니다. 일제 말 적국인 프랑스 선교사라는 이유로 용산 신학교에 연금되어 본당을 떠나야 했지만, 해방과 함께 다시 감곡 성당으로 부임해서 활동하다가 1947년 10월 선종하였습니다. 그 후 감곡 본당은 충청북도의 모본당으로서 많은 자본당을 분가했습니다.

 

1930년 충청북도에 최초로 건립된 감곡 성당은 1996년 1월 5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제대 정면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7발의 총탄을 맞았다는 본당 주보(主保)인 ‘매괴 성모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된 2층 건물인 사제관은 성당이 건립된 4년 후인 1934년에 완공되었고, 2002년 유물관(현 매괴 박물관)으로 변경되었습니다. 2005년에는 ‘가밀로 영성의 집’을 신축하여 피정의 집으로 운영하고 있고, 2008년 9월 매산 정상에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 사도 요한상, 임 가밀로 신부 성체강복상 등을 마련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청주교구는 2006년 10월 7일 감곡 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했는데, 성모 순례지 지정은 1991년 10월 7일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에 이어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입니다.

 

연풍순교성지

연풍은 성 황석두 루카의 고향이며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교우촌입니다. 박해를 피해 연풍으로 몰린 교우들은 새재라는 천혜의 도주로를 이용해 관문 성벽 밑의 수구문을 통해 문경 땅을 넘나들며 모진 박해를 피했습니다. 연풍과 새재가 기억하는 첫 인물은 12년간 새재를 넘나들며 이 지역에 신앙을 전한 최양업 신부입니다. 새재 아랫마을인 문경시 진안리의 어느 주막에서 선종한 최양업 신부는 새재의 연봉인 배론 신학당 뒷산에 안장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황석두 성인은 부유한 양반집 자손으로 젊은 나이에 과거 길에 나섰다가 ‘천국의 과거 시험에 급제’하고 돌아와 가족들의 모진 반대를 극복하고 가족들을 모두 입교시켰습니다. 학식과 신앙이 깊었던 연유로 다블뤼 주교를 도와 성경 번역과 사전 편찬에 종사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위앵과 오메트르 신부, 장주기 회장 등과 함께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습니다.

 

연풍 성지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63년 공소로 쓸 옛 향청 건물을 매입하면서부터입니다. 3백년이나 된 이 건물을 매입할 때만 해도 순교 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매입 후 논과 집 터를 정리하던 중 형구돌이 발견되었습니다. 또 1968년 시복식 후 황석두 성인의 고향이 연풍임이 드러나자 성지 개발이 가시화되어 1979년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문중 산에 묻힌 성인의 유해를 1982년 연풍 성지로 천묘했습니다. 이어서 다섯 성인상과 반석, 대형 십자가와 경당, 향청 건물 복원 및 야외제대와 성모상 등을 마련해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4년 9월에는 성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멍에목 성지

보은 멍에목은 복자 박경화 · 박사의 부자가 거주하던 교우촌이요, 최 양업 신부가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한 공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복자 김종륜, 순교자 최용운 회장과 안 루카, 여 요한 등이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던 천주교 성지다.

멍에목 성지에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살이와 참 신앙이 짙게 배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의 손길 아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신앙으로 인해 박해자들의 형벌 아래 죽어야만 하였다. 오늘의 후손들이 은총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신 분들이다.

 

상주 신앙고백비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 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고백비’가 서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복운의 아들 4형제가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중 차남인 김삼록 도미니코는 병인박해 중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난 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를 단단한 바위 위에 직접 새겼습니다.

 

이 신앙고백비가 교회의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1980년대의 일입니다. 김삼록은 신앙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여러 나무를 심어 눈에 잘 띄지 않게 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그의 손자인 김순경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신앙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습니다. 1982년 당시 서문동 본당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졌고, 1984년 서울대교구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졌습니다.

 

1980년대 안동교구와 남성동 성당을 중심으로 교회 사적지 개발을 위해 신앙고백비 주변 부지 매입이 시작되었고, 1999년 당시 옥산 성당 신기룡 신부와 회장단 그리고 청리 공소회장의 봉헌으로 성역화를 추진하여 대형 십자가와 제대, 십자가의 길, 2000년 대희년 상징 조형물 등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상주 신앙고백비는 2009년 12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상주옥터

상주에 있는 옥터성지는 안동교구 첫 번째 복자인 박상근 마티아(1837~1867)가 순교한 감옥터다. 1867년 1월 이곳 상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상주,문경,보은,충북 영동, 제천지역에서 체포되었던 천주교신자들이 이 옥에 갖혀 문초를 받거나 치명 순교하였는데, 상주 옥은 일제강점기인 1912년 성첩, 문루와 함께 헐린 것으로 보인다 한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으로부터 복자로 시복되었다.

상주 옥터성지 명칭으로는 지도 검색이 안된다. 이 곳 주소는 경상북도 상주시 남문2길 89-15다.

 

우곡성지,홍유한 고택지

경상북도 봉화군 문수산 중턱의 우곡리 골짜기 안에는 한국 교회 창립 이전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스스로 그 가르침을 고요한 가운데 실천한 홍유한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나 신동이라는 평판을 얻었던 그는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16세 때 성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정진했습니다. 1750년경부터 이익의 제자들과 교유하며 함께 “천주실의”와 “칠극” 등 서학을 연구하면서 유학이나 불교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오묘함이 천주학의 가르침 안에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했습니다.

 

홍유한은 깨달은 바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1757년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여 18년간 “칠극”에 따른 천주교의 수계생활에 정진했습니다. 1775년 그는 더 깊은 믿음을 위해 경상북도 소백산 밑의 단산면 구구리로 들어갔습니다. 축일표도 기도서도 없었지만 매월 7일째 되는 날을 주일로 정해 세속의 모든 일을 접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으며, 금식재와 금육재를 지키는 정확한 날을 모르는 대신 언제나 가장 좋은 음식은 먹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습니다. 고행과 절식, 기도와 묵상으로 만년을 보낸 그는 1785년 세상을 떠나 우곡리에 안장되었습니다. 비록 그는 세례를 받은 공식적인 천주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학문 연구를 통해 얻은 진리를 자신의 삶속에서 실천한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뜻을 이어받아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후손들이 13명이나 됩니다.

 

이에 후손들은 선조 순교자들을 현양하고자 했으나 유해를 찾을 길 없어 고심하다가 안동교구와 협의하여 선조인 홍유한 선생의 묘가 있는 우곡 성지에 13위 순교자들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2009년 5월 안동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아 13위 순교자들의 순교 터에서 흙을 담아와 가묘를 조성하고 ‘홍유한 후손 순교자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이로써 우곡리의 골짜기는 홍유한 선생과 그 후손 순교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후배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주는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이에 앞서 안동교구는 1993년 우곡리에서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수덕자인 홍유한 선생의 묘를 발견하고 이듬해 성지개발위원회를 발족하여 1995년 묘지 축복식과 유적비를 건립하고 순차적으로 십자가의 길 등을 조성했으며, 1998년 11월 15일에는 홍유한 피정 집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0년 10월 25일에는 청소년들의 신심 교육과 성지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해 청소년 수련원 겸 성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고, 2005년 9월 25일에는 우곡 성지 성역화 10주년을 맞아 대형 십자가와 홍유한 선생 동상을 세워 축복식과 기념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15년 9월에는 홍유한 선생의 수덕생활을 기억하고 본받기 위해 칠극의 길을 조성하여 비석 제막식을 거행했습니다.

 

문경여우목성지

여우목은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예로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충청도 홍주 출신의 이윤일 가정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도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 서인순 시몬,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습니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고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문경 성당은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년 9월 서치보와 서인순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 4월 대형 십자가, 11월 제대 · 성모상 ·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년 9월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문경 진안리성지

소백산맥의 문경 지방과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있는 조령(일명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그래서 숙종 34년에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했습니다. 이곳이 영남의 관문이기에 서울로 과거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신부와 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1836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1849년 4월 15일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5개 도(道)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은 그의 활동은 12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울주군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으나 무사히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 방문을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선종 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교우촌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초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안동교구는 문경 성당을 중심으로 1999년 진안리 오리터에 마련한 356평 규모의 부지에 대한 토목공사를 시행하고, 2000년 5월과 11월에 대형 십자가와 돌 제대를 설치했습니다. 이어 조경공사를 마친 후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의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제대 뒤에 조형 벽체를 세우는 등 순례자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원성지

영남의 관문인 새재 아래 위치한 문경시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인근 교우촌처럼 화전을 일구며 살던 유서 깊은 교우촌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새재를 넘어 마원까지 미쳤고, 이때 마을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습니다.

 

현재 마원에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남아 있습니다. 칼래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좁쌀을 사기 위해 한실 교우촌에 갔다가 그곳에 숨어 있던 칼래 신부를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에게 발각되어 3일 만에 새벽을 틈타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 했는데,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자 칼래 신부는 박 마티아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했습니다. 칼래 신부의 명에 순명하여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박 마티아는 그 해 12월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고,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경 인근에서 잡혀온 교우들을 권면하며 순교의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1867년 1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 고향에 안장했습니다.

 

박상근 마티아의 묘는 1983년 초 처음 발견되어, 1985년 9월 현재의 위치에 조성한 새 무덤으로 이장했습니다. 1995년 초 문경지구 사목협의회는 성지 개발을 위해 주차장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로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 마티아의 장한 믿음과 숭고한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과 부활하신 예수상, 십자가의 길, 성모상 등을 세우고 1996년 10월 3일 동상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죽산순교성지

죽산은 조선 시대 이미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가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순교성지입니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4명이나 됩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이 죽산 도호부에서 심문을 받고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병인박해 이후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없었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이처럼 거룩한 순교터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포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죽산 도호부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잊은터로 불리며 처형지로 사용되었던 곳의 땅을 확보하여 성지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죽산 순교성지는 개발 단계부터 가톨릭교회의 성체 · 성모 ·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풍스런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가장자리로 묵주기도 길이 있고, 묘역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와 순교자 현양탑이 날개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묘역 뒤로는 십자가상과 십자가의 길, 소성당 그리고 옆에 대성당을 마련하여 2000년 9월 3일 최덕기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6년 9월 28일에는 죽산 순교성지에서 3.5km 거리에 있는 죽산면사무소 입구 쪽에 조성한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선포 및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미리내 성지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883년 공소가 설립되었다가 189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1907년 초 성 요셉 성당이 건립되었습니다. 1976년 성직자 묘지 상단에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 17위의 유해를 이장해 모셨는데, 그 중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대구대교구로 천묘했습니다. 16위의 유해 중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가 2013년 손골 성지로 이장되어 현재는 12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합장되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에는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경당 앞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습니다. 경당 밖 왼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목숨을 걸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모시고 밤낮으로 돌본 이민식이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1970년대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어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1980년대에 경당 옆 광장을 확장하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습니다.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었고,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 전시장이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성당 뒤편으로 옮겨 설치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25일 수도회에서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의 관할권이 수원교구로 이관되었습니다. 2015년 4월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을 제작해 설치했습니다.

 

은이성지

은이 마을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1836년 15세의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입니다. 또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였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입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 또한 은이 공소였습니다.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1996년 그동안 방치되었던 은이 공소터 일부를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면서 성지 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과 2003년에 주변 땅을 추가 매입하고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 등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2013년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은 곳으로 추정되는 은이 공소터의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2015년 8월 김가항 성당 복원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 기공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16년 9월 김대건 신부 순교 170주년을 맞아 새 성당 봉헌식과 바로 옆에 신축한 김대건 기념관에 대한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로써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과 성장, 세례성사와 신학생 선발, 사제 수품, 사목 활동, 순교에 이르는 생애 전반을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는 성지로 거듭났습니다.

 

골배마실성지

골배마실 성지는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교우촌입니다. 김대건 신부 가족은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으로 와 골배마실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소년 김대건은 부모로부터 신앙생활과 교리를 배워 1836년 15세의 나이로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신학생을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845년 사제품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 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적인 재회를 한 곳도 골배마실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성장한 집터에는 성인 동상과 야외제대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성지가 양지파인리조트(골프장) 안에 위치한 관계로 평소에는 보존을 위해 문을 잠가놓기 때문에 먼저 은이 성지 사무실로 문의하셔야 합니다.

 

요당리성지

요당리 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양간 공소라 불리던 교우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닷물이 유입되어 뱃길이 열렸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지였습니다.

 

장주기 성인과 복자 장 토마스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고, 그 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 재정 확보를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그 책임을 맡았던 민극가 성인과 공소회장을 역임한 정화경 성인이 활동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성 앵베르 주교와 그분의 피신을 도운 손경서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순교사적지로서의 이런 중요성으로 인해 수원교구는 2006년부터 전담사제를 파견해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습니다. 기도의 광장 양편으로 묵주기도 길과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성역화 광장에는 대형 십자가와 요당리와 관련 있는 순교자들의 의묘를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성당과 부속건물들을 완공해 다음 해 5월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남양성모성지

남양 성모 성지는 초대 교회의 교우촌이자 처형지로 1991년 10월 7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모 성지로 선포된 곳입니다. 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해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 많은 교인들이 찾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백학, 활초 등 많은 교우촌이 인근에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옹기를 구워 팔던 백학 교우촌에서 가마터와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교우촌은 왕림과 큰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안양 수리산, 양지 골배마실, 안성 미리내, 진천 배티, 아산 걸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품처럼 아늑한 성지에 들어서면 남양 성모 성지의 자랑인 ‘묵주기도 길’이 펼쳐집니다. 성지 전체가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는데 대형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비롯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묵주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2006년에는 하느님의 자비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경당 위 야산 정상에 자비로우신 예수님 동산을 새로 조성해 봉헌했습니다. 동산 둘레로는 하느님의 자비심을 구하는 5단 묵주기도 길을, 동산 아래에는 성모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도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1년 성모 성지 봉헌 20주년을 맞아 성지 환경을 정비하고, 2016년 5월 남북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남양 성모 마리아 대성당 기공식을 갖고 현재 마무리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손골성지

손골 성지는 원래 교우촌이 있던 곳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주된 선교지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사목하다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홀로 포졸들에게 체포된 곳일 뿐 아니라 성 오메트르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한국말과 풍습 등을 배우며 선교를 준비하고 활동하던 곳입니다. 이를 기념해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동상, 십자가의 길, 경당과 기념관, 피정의 집, 도리 신부 순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수차례 변형 후 2014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된 도리 신부 순교비 위에는 1966년 성인의 고향 본당에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성인의 생가 벽에 나머지 하나는 손골에 기증한 돌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2013년 10월에는 손골에서 신앙생활하다 체포되어 서봉 인근 개울가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서 손골 성지로 옮겨 안치하고 순교자의 길을 조성하였습니다. 2015년 3월에 성 오메트르 신부 동상을 세우고, 2016년 5월에는 성지 설립 50주년과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해 새 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이어 2017년 5월 기존의 경당을 보수해 손골 기념관을 개관해 성지와 성인 관련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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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전지는 넉넉하게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수첩과 필기구, 회화집 등도 준비하시면 편리합니다.
- 개인취향에 맞게 컵라면, 김 등 밑반찬을 준비하시고, 구급상비약도 챙기시기 바랍니다.

* 기내휴대품 반입 금지 품목은 미리 붙이는 가방(수화물 또는 위탁수화물)
예) - 건전지, 면도기, 손톱 깎기, 칼 등은 기내용 가방에 넣을 수 없으므로 붙이는 가방에 넣어주세요.

- 100ml를 초과하는 액체, 분무, 겔류 등도 붙이는 가방에 넣어주세요.

* 라이터는 붙이는 가방에 넣을 수 없으므로 휴대가방에 1인 1개만 허용됩니다.






- 2007년 3월 1일부터 국제선을 이용하시는 모든 승객들은 100ml가 초과하는 액체, 분무, 겔류의
기내 휴대 반입이 제한되었습니다.
- 100ml이하의 등 물품은 별도의 정해진 팩(일명 지퍼백)에 넣어 반입하셔야 되며, 100ml를 초과
하는 물품은 반드시 붙이는 가방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 국토교통부는 국민여행편의 제고와 동시에 항공보안 강화를 위해 2014년1월1일부터
[항공기내 반입금지 물품]을 변경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국토교통부 [항공기 반입금지 물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관련 홈페이지: http://www.molit.go.kr/doc/apdg/guide1.jsp#

- 위의 사항으로 출국수속시간이 지연될 수 있으므로 정해진 미팅시간을 준수하여주시기 바랍니다.





- 유명 관광지 및 기차역 주변, 기타 사람이 많이 밀집된 곳에서는 소매치기 또는 분실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므로 특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여행 중 도난에 의한 물건 분실의 경우 반드시 현지 경찰서의 경위서(Police report)를 받아오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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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경보단계안내]

외교통상부에서는 해외여행, 체류시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국가와 지역에 경보를 지정하여 위험수준과 이에 따른 안전대책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남색경보(여행유의 일부)/황색경보(여행자제 일부)/적색경보(철수권고 일부)/흑색경보(여행금지) 4단계로 구분하여 지속적으로 변경되고 있으니 출국 전 꼭 확인을 부탁드리며,
해외여행 등록제를 이용하시면 해외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 사고로부터 효율적인 도움을 제공해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외교통상부 여행경보제도 안내 페이지(http://www.0404.go.kr/country/warningList.do?menuNo=102000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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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통상부에서는 해외여행, 체류시 특별한 주의가 요구되는 국가와 지역에 경보를 지정하여
위험수준과 이에 따른 안전대책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남색경보(여행유의 일부)/황색경보(여행자제 일부)/적색경보(철수권고 일부)/흑색경보(여행금지)
4단계로 구분하여 지속적으로 변경되고 있으니
출국 전 꼭 확인을 부탁드리며, 해외여행 등록제를 이용하시면 해외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건,
사고로부터 효율적인 도움을 제공해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외교통상부 여행경보제도 안내 페이지(http://www.0404.go.kr/country/warningList.do?menuNo=102000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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