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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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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기 한국천주교회 발상지이자 초기 가톨릭 신앙공동체의 요람 수원교구1박2일 수많은 순교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순례하며 기도하는 일정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상품특전►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출발 부터 성지 관련 안내는 물론 차량 운영이 가능한 드라이브 스루 가이드가 함께하며 편안하게 모십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 )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 불포함사항►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특이사항►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쇼핑센터NO쇼핑 일정표
남한산성 순교성지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1791년 신해박해,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제 순교자는 2~3백 명으로 추산)이 순교한 곳입니다. 현재의 남한산성은 조선 인조 2년(1624년) 때 중건한 것으로 후금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2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고 합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서는 길은 두 군데로 서쪽으로는 성남 방면, 동쪽으로는 광주 방면으로 연결됩니다. 치명터는 동문에 자리하고 있는데,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습니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이 죽어서는 물이 빠지도록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습니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되었습니다. 남한산성 로터리에는 천주교인들을 수감했던 옥터와 처형터가 있습니다. 수원교구는 1998년 남한산성을 성지로 선포하고 공영주차장 인근 작은 개천 옆에 마련한 부지에 순교자현양비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고, 성당 뒤편 산에는 야외미사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순교의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은 2014년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2015년 4월에는 기존의 협소한 성당을 대신할 한옥 형태의 새 성당을 완공해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구산성지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이자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교우촌인 구산 마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산에서 태어난 김성우 성인은 36세에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성인은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기도 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고, 1840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성인은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순교 후 그의 유해는 아들 김성희 암브로시오 등에 의해 수습되어 고향에 안장되었습니다. 1927년 5월 30일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와 명동 성당을 거쳐 절두산 순교자 기념성당 지하의 유해안치실에 모셔졌습니다. 현재 구산 성지 순교자 묘역에는 김성우 성인과 가족 그리고 구산 출신 순교자 등 9위의 무덤이 진묘와 의묘 형태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1984년 5월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천진암성지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당대의 석학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습니다. 권철신 ·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들은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에게 그리고 마재의 정약종과 그 형제들, 양근의 권철신 · 일신 형제들에게 세례를 주고, 서울 명례방에 살던 통역관 김범우를 입교시켜 수도 한복판에 한국 천주교회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는 오랫동안 잊혀오다가 1960년에 와서야 그 가치가 드러나 1980년 천진암 일대 부지를 매입하여 그 초입에 가르멜 수녀원을 설립하고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를 이벽의 묘 옆으로 이장해 창립 선조 묘역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성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올라가면 정하상과 유진길 성인의 묘가 있는데, 이들은 성직자 영입 운동과 조선 독립교구 설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순교성인들입니다. 양근성지 양근(楊根)이란 ‘버드나무 뿌리’란 뜻으로 남한강 변에 폭우와 홍수로부터 제방의 붕괴를 막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던 데서 유래한 지명입니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권철신과 권일신이 태어난 곳입니다. 이승훈 베드로가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과 유항검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여 조과, 만과, 성로신공 기도 등을 바치며 천주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가성직제도 하에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습니다. 양근 성지는 조숙 베드로와 권천례 데레사 동정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한 곳으로, 이 동정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습니다. 또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 윤점혜, 권상문이 참수형으로 순교한 곳입니다. 그 외에도 조용삼, 홍익만이 순교한 곳으로 이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양근천이 한강과 만나는 일명 오밋다리 부근 백사장에서 목이 잘리고 시신이 내버려졌던 곳입니다. 단내성가정성지 단내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박해의 회오리가 단천리 교우촌에 몰아쳤을 때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고,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에는 마을 뒤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갔고,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병든 작은 할아버지를 모시고자 자진하여 잡혀갔습니다. 배교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그들은 그해 말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양묵 베드로의 시신은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단내 성가정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의 성인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특히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한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5위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에서는 2003년 기념성당과 5위 성인 순교비를 세우고, 지속적인 성지 개발과 성가정의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농성지 어농 성지에는 한국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의 묘가 있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던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순교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유일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하여 후손을 찾지 못하던 중 1987년에 한 후손이 나타나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과 윤관수, 그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와 윤운혜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 등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 해 6월 28일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어농 성지는 윤유일 일가 묘소를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해 1999년 예수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고, 2002년에는 사제관과 성당을 마련했습니다. 그 해 8월 13일 최덕기 주교에 의해 ‘을묘 ·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성지’로 선포된 어농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다가 치명한 을묘박해 3위 순교자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6년 동안 조선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 14위를 현양하고 있습니다. 이들 17위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한편 어농 성지는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순교 영성과 성소를 불어넣어 주는 청소년 성지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죽산순교성지 죽산은 조선 시대 이미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가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순교성지입니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4명이나 됩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이 죽산 도호부에서 심문을 받고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병인박해 이후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없었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이처럼 거룩한 순교터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포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죽산 도호부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잊은터로 불리며 처형지로 사용되었던 곳의 땅을 확보하여 성지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죽산 순교성지는 개발 단계부터 가톨릭교회의 성체 · 성모 ·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풍스런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가장자리로 묵주기도 길이 있고, 묘역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와 순교자 현양탑이 날개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묘역 뒤로는 십자가상과 십자가의 길, 소성당 그리고 옆에 대성당을 마련하여 2000년 9월 3일 최덕기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6년 9월 28일에는 죽산 순교성지에서 3.5km 거리에 있는 죽산면사무소 입구 쪽에 조성한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선포 및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미리내 성지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883년 공소가 설립되었다가 189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1907년 초 성 요셉 성당이 건립되었습니다. 1976년 성직자 묘지 상단에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 17위의 유해를 이장해 모셨는데, 그 중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대구대교구로 천묘했습니다. 16위의 유해 중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가 2013년 손골 성지로 이장되어 현재는 12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합장되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에는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경당 앞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습니다. 경당 밖 왼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목숨을 걸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모시고 밤낮으로 돌본 이민식이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1970년대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어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1980년대에 경당 옆 광장을 확장하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습니다.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었고,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 전시장이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성당 뒤편으로 옮겨 설치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25일 수도회에서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의 관할권이 수원교구로 이관되었습니다. 2015년 4월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을 제작해 설치했습니다. 은이골배마실성지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이고, 증조부는 김진후(金震厚, 비오, 1739-1814)이며, 조부는 김택현(金澤鉉)이다. 부친은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 1796-1839년) 성인이며 모친은 고 우르술라로 선대 때부터 여러 대에 걸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충청도 솔뫼에서 살아왔다. 김대건은 1821년에 탄생하였고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며, 보명(譜名)은 지식(芝植)으로 관명(冠名)은 대건(大建)이다. 김대건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증조부 김진후였다. 그는 1791년(신해박해)에 체포되어 1801년(신유박해) 때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 다시 잡혀 충청도 해미에서 10년간의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에 순교하였다.
양지파인리조트 골프장 내에 위치한 성지 입구 모습.김대건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였던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배마실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즉 배마실(현 양지성당 소재지)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김대건의 가족이 거주하던 집은 배마실까지 이어지는 골짜기 안에 있어 ‘골배마실’이라고 붙여졌다.
소년 김대건이 세례성사를 받게 된 때는 한국에 프랑스 선교사로서 처음 입국한 나 모방 신부로부터 15세 되던 해인 1836년 은이 공소에서였다. 그러나 소년 김대건은 세례는 받지 않았어도 곧바로 신학생 후보로 선발이 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가정에서 이미 교리 공부와 기도 생활은 착실히 배워 실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16년 이후 시작된 평신도 지도자들의 꾸준한 성직자 영입 운동이(매년 중국교회를 방문했던 시기) 무르익어 결실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소년 김대건은 성직자에게 직접 세례 성사를 받고자 하는 뜻을 갖고 기다렸음이 확실하다.
이처럼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조선 땅에 이제 곧 오실 신부님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교리를 익히고, 조선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바치고자 하는 포부를 가슴에 담고 살았던 장소이고,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간직하고 생활했던 곳이다.
골배마실은 옛날부터 양지 교우(신자)들 사이에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살던 집터로 구전되어 왔었다. 하지만 이곳을 발굴하게 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골배마실 성지는 1961년 양지 본당 5대 주임이었던 정원진 루카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 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40년 가까이 옛 모습 그대로 있던 성지를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는데, 새로이 청동으로 제작된 2미터짜리 성상을 모셔 7월 5일 대축일을 맞아 축성하였고 처음 골배마실 성지에 모셔졌던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은 양지 성당 정원에 모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요당리 성지 요당리 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서울과 충청도 내포 등지의 신자들이 피난하면서 형성된 양간 공소라 불리던 교우촌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닷물이 유입되어 뱃길이 열렸던 지리적 특성상 충청도와 경기도 내륙, 서울을 잇는 선교 길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로 하느님을 증거한 수많은 신자들의 신앙의 요람지였습니다. 장주기 성인과 복자 장 토마스의 출생지이자 신앙의 터전이었고, 그 외에도 많은 순교자들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또한 교회 재정 확보를 위한 전답이 운영되었던 곳으로 그 책임을 맡았던 민극가 성인과 공소회장을 역임한 정화경 성인이 활동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성 앵베르 주교와 그분의 피신을 도운 손경서 순교자의 얼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순교사적지로서의 이런 중요성으로 인해 수원교구는 2006년부터 전담사제를 파견해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습니다. 기도의 광장 양편으로 묵주기도 길과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성역화 광장에는 대형 십자가와 요당리와 관련 있는 순교자들의 의묘를 조성했습니다. 그리고 2009년 성당과 부속건물들을 완공해 다음 해 5월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남양성모성지 남양 성모 성지는 초대 교회의 교우촌이자 처형지로 1991년 10월 7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모 성지로 선포된 곳입니다. 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해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 많은 교인들이 찾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또 백학, 활초 등 많은 교우촌이 인근에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옹기를 구워 팔던 백학 교우촌에서 가마터와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교우촌은 왕림과 큰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안양 수리산, 양지 골배마실, 안성 미리내, 진천 배티, 아산 걸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성모님의 품처럼 아늑한 성지에 들어서면 남양 성모 성지의 자랑인 ‘묵주기도 길’이 펼쳐집니다. 성지 전체가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는데 대형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비롯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묵주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한 2006년에는 하느님의 자비 신심을 전파하기 위해 경당 위 야산 정상에 자비로우신 예수님 동산을 새로 조성해 봉헌했습니다. 동산 둘레로는 하느님의 자비심을 구하는 5단 묵주기도 길을, 동산 아래에는 성모님과 함께 걷는 십자가의 길도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2011년 성모 성지 봉헌 20주년을 맞아 성지 환경을 정비하고, 2016년 5월 남북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남양 성모 마리아 대성당 기공식을 갖고 현재 마무리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원성지 다산 정약용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한 수원 화성은 그 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의 처형지가 되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당한 신자들이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순교한 곳입니다. 둘레 5743m에 이르는 성곽 전체가 이름이 알려진 83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껴안은 순교지입니다. 현재까지 화성 내부 십여 곳 이상이 순교지와 증거지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시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2000년 수원 화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북수동 성당(구 수원 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수원 성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수원 성지는 2차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중 수원에서 순교한 17위의 하느님의 종과 무명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습니다. 손골성지 손골 성지는 원래 교우촌이 있던 곳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주된 선교지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사목하다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홀로 포졸들에게 체포된 곳일 뿐 아니라 성 오메트르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한국말과 풍습 등을 배우며 선교를 준비하고 활동하던 곳입니다. 이를 기념해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동상, 십자가의 길, 경당과 기념관, 피정의 집, 도리 신부 순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수차례 변형 후 2014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된 도리 신부 순교비 위에는 1966년 성인의 고향 본당에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성인의 생가 벽에 나머지 하나는 손골에 기증한 돌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2013년 10월에는 손골에서 신앙생활하다 체포되어 서봉 인근 개울가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서 손골 성지로 옮겨 안치하고 순교자의 길을 조성하였습니다. 2015년 3월에 성 오메트르 신부 동상을 세우고, 2016년 5월에는 성지 설립 50주년과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해 새 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이어 2017년 5월 기존의 경당을 보수해 손골 기념관을 개관해 성지와 성인 관련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수리산성지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했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 불렸습니다. 박해시대 외부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했던 수리산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의 묘가 있습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으로 3대째 신앙을 지켜왔으나 장남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고 전교회장직을 맡아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과 어린 자녀들까지 모두 옥에 갇혔습니다. 어린 자식 때문에 잠시 배교하겠노라 말했던 이성례는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옥을 찾았습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하였고, 그 이듬해 1월 31일에는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성지 입구에는 순례자 성당과 피정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이 자리하고 있고, 조금 올라가면 2008년에 복원되어 성당으로 사용하는 최경환 성인의 고택이 있고, 고택 왼쪽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면 최경환 성인 묘소가 나옵니다. 성인 묘소까지 오르는 길에는 1987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고 묘역에는 성모 동굴과 야외미사를 위한 제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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