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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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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원주교구 → 춘천교구 1박2일 춘천 1박2일 한국전쟁속 순교사 발자취 춘천 일대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순례하며 묵상하는 성지순례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상품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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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로성당 광복 무렵 죽림동 본당 관할이었던 소양로 지역의 신자수가 늘어나자 1950년 1월 소양로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콜리어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리어 신부는 성체를 옮겨 모시고 신자들에게 피신을 권고한 후 사태를 지켜보다가 6월 27일 죽림동 주교좌성당으로 이동하던 중 체포되어 복사 김경호 가브리엘과 함께 공산군에게 심문을 받고 이동 중에 총살당했습니다. 이로써 콜리어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가운데 한국 전쟁의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여러 어려운 상황으로 성당 마련이 늦어지다가 1956년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버클리 신부가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같은 해 9월 3일 9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버클리 신부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반원형 평면 양식을 택해,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나가도록 했습니다. 소양로 성당의 이러한 건축기법은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적절히 혼합된 형태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제 제16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후 소양로 성당은 2006년부터 문화재청과 강원도 및 춘천시의 도움을 받아 원형 보존 작업을 시행했습니다. 이음매가 낡은 함석지붕과 창호를 보수하고 없어졌던 성가대와 벽 제대를 복원했으며, 붉은 카펫이 깔려있던 제단을 나무 널판으로 바꾸고 목조 난관으로 그 둘레를 둥글게 감았습니다. 성전 외벽을 두르고 있던 전선을 모두 지하로 넣어 원형을 최대한 살려 2009년 5월 중창(重創)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또한 춘천교구는 양 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은 콜리어 신부의 순교혼을 기억하고자 소양로 성당을 살신성인 기념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콜리어 신부는 현재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시복 대상자 중 한 명으로 시복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양양성당 영동 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양양 지역은 섭가지 · 풍수원 · 원산 · 안변 · 내평 본당 관할을 거쳐 1921년 5월 5일 ‘양양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1922년 양양읍 서문리에 지은 성당이 1936년 수해로 침수되자 시내 중심지의 현 성당 부지를 매입하여 3대 이광재 신부가 1940년 성당과 교육회관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나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군의 주둔으로 성당을 빼앗겼고, 1948년부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양양 본당을 거쳐 남하할 때 이광재 신부는 이들이 무사히 월남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갇혔다가 10월 9일 총살당했습니다. 전란 중 화재로 소실된 성당은 동명동 본당에서 사목하던 맥고완 신부가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양양 지역을 맡아 사목하면서 신축하였습니다. 양양 성당은 이광재 신부의 신앙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3년 이광재 신부 순교 기념각을 세웠습니다. 2000년 순교 50주년을 맞아 순교각 옆의 옛 수녀원 건물에 기념관을 개관하고, 전쟁 중 신자들이 옹기에 숨겨놓고 피난을 떠난 덕에 남은 이광재 신부의 제의와 제구, 친필 교리서 등의 유품과 사료들을 전시하였습니다. 이광재 신부는 2007년 1940-50년대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한 춘천교구의 조사를 통해 그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2009년 6월 9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옆에 석상이 봉헌되었습니다. 춘천교구는 2017년 9월 양양 성당을 성지로 선포했고, 현재 이광재 신부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안건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임당동성당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80년대에 이미 강릉군 내에 삼정평, 새울, 금광리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1921년 5월 양양 본당, 12월 금광리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적어 1923년 말에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했습니다. 1929년 성당 화재 이후 잠시 금광리로 본당을 옮겼다가 1934년 발전 가능성이 더 컸던 강릉으로 다시 이전했습니다. 강릉으로 이전한 후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중 광복을 맞았고, 광복 후 본당의 내실화는 물론 사회복지와 교육사업 등을 통해 지역과 함께하는 본당 공동체를 구현했습니다. 1951년 대지를 매입한 뒤 1955년 10월 현재의 성당을 신축했고, 1974년 본당 명칭도 강릉 본당에서 임당동 본당으로 바꾸었습니다. 1981년으로 본당 설립 60주년을 맞아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1991년에는 성당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청동 십자가, 제대, 14처, 유리화 등을 갖추고 1992년 11월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 화보집을 발간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11월에 노후화된 사제관, 수녀원, 유치원을 신·증축하여 본당의 면모를 일신했습니다. 성당 앞 왼쪽에는 강릉 대도호부 관아가 있습니다. 이곳의 칠사당과 객사문에서 병인박해 당시 많은 신자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임당동 성당은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로 외관의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 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 기법에서 보존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母)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년 2월 19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9년 1월에는 성당 옆에 신축한 임당동 근대문화유산 유물전시관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이다.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객사문(국보 제51호)만 남아 있다. 객사문은 고려시대 건축물 가운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건물 가운데 하나로, 공민왕이 쓴 ‘임영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1993년에 강릉 시청 건물을 지을 계획으로 실시한 발굴 조사한 결과, 고려 · 조선에 이르기까지 관아 성격의 건물터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임영지』의 기록을 통해 이 유적의 중요성과 옛 강릉부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문진 성당 행정 공소 주문진 본당은 1923년 11월 23일 금광리에서 사목하던 이철연 신부가 주문진(현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원길 51)으로 이전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으며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이다. 본당 설립 전의 주문진은 경상도 경주에서 박해를 겪은 두 형제가 양양군 현남현 견불리에 정착하기까지 이 지방은 신앙의 불모지였다. 그들은 토기업에 종사하며 가족들을 이끌고 주문진으로 이사하여 정착하면서 또 다른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원산본당에 소속되어 봄, 가을로 판공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강릉 아래의 금광리(현 강릉시 구정면 금평로 514)신자들은 1921년의 가을 판공 때 양양본당 주임신부에게 보좌신부인 이철연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는데 실제로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수도 많았고 공소 강당과 신부가 머무를 수 있는 사제관도 마련해 놓아 사제 파견 요청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신부를 파견해 주기로 약속하였고 이철연 신부는 1921년 12월 2일 금광리로 내려가 ‘금광리본당(주문진본당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이철연 신부는 금광리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이 곳 신자들이 열심이긴 하나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고 발전가능성도 없다고 판단하여 장차 양양이나 주문진, 강릉지역으로 본당 중심지를 옮기려고 생각하고 양양본당의 최문식 신부와 상의하여 주문진으로 이전을 결정하고 먼저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과 사제관을 짓기로 하였다. 1923년 초 작은 야산과 그 아래에 너와집 한 채가 있는 땅을 매입하여 6월에 비가 새는 지붕을 기와로 개량하고 집을 증축한 뒤 1923년 11월 23일 금광리를 떠나 주문진(현 강릉시 주문진읍 교항원길 51)으로 이전하였으며 이때부터 ‘주문진 본당’이라 명명하였다. 본당을 주문진으로 옮긴 후에 전교는 활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 개항된 주문진보다 강릉 지역이 더 발전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설상가상으로 1929년 1월에 주문진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화재 후 김인상 신부는 본당을 금광리로 이전하였다가 다시 강릉으로 이전하였다. 전소된 성당과 본당신부의 부재로 주문진 본당은 22년간 공소가 되었다. 1951년 11월,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신부가 주문진 공소로 부임하면서 서서히 교세를 회복하여 신자수가 300여명에 이르러 1955년 1월 새로운 성전에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에는 성모상을 건립하여 안치하고, 제의방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 일부(모발, 뼈)를 모시게 되었다. 1958년에는 행정 공소(강릉시 연곡면 행정2길 14, 벽돌을 교우들이 구워 만든 공소로 교구의 사적지)와 인구 공소, 1959년에는 삼산 공소를 신축하였으며 꾸리아의 발족 및 여러 단체들이 신설되고 활성화되면서 본당으로서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1967년 9월 3일 교구와 골롬반 외방선교회에서 관할하던 주문진 성당은 작은 형제 수도회로 사목이 위임되었다. 작은 형제 수도회는 30년간 주문진 본당에서 사목을 하면서, 신자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였고 그 외에도 본당 주보를 창간하고 학생회와 청년회 등 여러 단체를 신설하고 영동지구 청년회원들의 모임인 ‘형제들의 모임’을 조직하여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1985년에는 아씨시의 전교 수녀회가 진출하도록 하였다. 1997년 9월 3일 작은 형제 수도회가 주문진 본당에서 철수하고 춘천교구에 사목권을 위임하면서 주문진 성당은 교구 소속 신부가 부임하게 되었다. 수도회에 의해서 30년간 사목되어지던 본당에 부임한 교구 사제는 본당의 쇄신을 위해 노력하였고 1998년 11월 ‘주문진 본당 75년사’를 발간하였으며 성서 백주간 및 성서쓰기 운동을 전개하며 본당 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2002년 8월 태풍 루사의 피해로 성당 곳곳이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사제⦁수도자⦁평신도 모두가 힘을 합해 새롭게 중창을 하여 전국의 많은 성당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아름다운 성전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교구에서는 주문진 관할터(영동지구와 영북지구의 가운데 격이라 할 수 있는 이곳)에 영동·영북 지구를 사목적 배려하기 위하여 교구 제2청사를 지어 교우들의 교육/피정/연수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계획하고 있다. 노암동 성당 금광리 공소 금광리 공소는 1887년 설립된 강릉 지역 천주교의 모태와도 같은 곳입니다. 강원도 영동 지역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된 계기는 대원군에 의해 일어난 병인박해(1866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릉 지방에 천주교 공소가 만들어진 시기는 19세기 말경인데,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과 현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공소 초기 원산 본당 관할이었으나 주문진 성당 공소를 거쳐 현재는 노암동 성당 관할 공소입니다. 1921년 한때 금광리 공소는 양양 본당 보좌신부의 파견으로 본당이 되기도 했지만, 지역적으로 외진 이유로 1923년 주문진에 새 부지를 마련해 이전함으로써 주문진 본당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묵호성당, 라 파트리치오 신부 순교터 6.25때 학살당한 라 바드리치오 신부가 사목하던 성당과 순교터 1931년 하경연 요셉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묵호지역은 1940년 강릉 본당(현 임당동 본당) 관할의 묵호 공소가 설정되었으며 1948년 6월에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는 맥간 프란치스코(F. McGann Francisco 1948~1949. 9) 신부가 부임하였다. 6.25전쟁 때에는 북한군에 의해 성당이 점거되고 주임신부가 피살되었다. 당시 묵호 본당은 제2대 주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출신 패트릭 레일리(Patrick Reilly, 1915.10.21∼1950.8)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다. 라 바드리치오 신부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레일리 신부는 1915년 아일랜드에서 출생해 1940년 사제품을 받은 후 1949년 3월 묵호 본당 제2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6ㆍ25전쟁 발발과 동시에 인민군 육전대 병사 1800여 명은 동해안 옥계, 정동진, 금진 지역에 기습 상륙, 그날 묵호를 점령하였다. 묵호 축항사무소(현 동해지방 해운항만청)에 근무하던 최창환 요셉이 배를 구해 레일리 신부를 찾아가 피난을 간곡히 권유했다. 하지만 레일리 신부는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혼자 도망할 수 없다"며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레일리 신부는 묵호성당이 인민군에게 징발되자 묵호읍 만우리에 있던 남봉길(프란치스코) 전교회장 집에 잠시 피신해 있다가 남 회장과 함께 체포됐다. 묵호 읍내로 끌려간 레일리 신부는 이후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아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불안해하던 공산군에 의해 밤재굴에 몰린 채 학살당했다. 당시 군종 사제였던 이경재 신부가 해군 사령관 백기조 대령과 함께 도로변에 묻힌 레일리 신부의 유해를 찾아내 묵호 경비사령부 앞에 매장하였다가 묵호성당으로 옮겼으며, 이후 레일리 신부의 시신은 춘천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에 이전 안치되었다. 후베르토 신부는 "레일리 신부를 비롯한 포로들이 밤재굴 근처에 다다랐을 때 아군 전투기가 나타나 기총소사를 하자 공포에 질린 인민군들이 포로들을 밤재굴에 집어넣고 학살했다"고 증언했다. 후베르토 신부는 이어 "레일리 신부 시신은 해군 장교 신자에 의해 산속에 가매장됐다가 국군과 유엔군이 묵호를 재탈환한 직후 한국인 군종 신부가 거두어 춘천교구 주교좌 죽림동 성당으로 옮겼다"고 덧붙였다. 레일리 신부의 장례미사는 1951년 10월에 가서야 치러졌다. 라 바드리치오 신부가 1950년 8월 29일 다른 포로들과 함께 강릉으로 이송되던 중 공산군에 의해 학살당한 밤재굴 순교터는 묵호성당에서 강릉방면 7호선 국도 동해대로로 15km 거리에 있다. 강릉시 옥계면 밤재 철도굴(현 강릉시 옥계면 낙풍리 산 16-2) 남쪽 굴 입구에서 약 200m 남쪽에 「라 바드리치오 신부 순교비」가 있는 주변이 순교터로 알려져 있다. 성내동성당 성내동 성당은 1946년 강릉(현 임당동) 본당의 삼척 공소로 시작해 1949년 10월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매긴 신부는 1950년 7월 북한군에게 피살되어 순교했고, 이듬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버크 신부가 본당의 기틀을 다져 나갔습니다.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코너스 신부는 현 성당 부지에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해 1957년 11월 본당을 이전했습니다. 1961년 11월 본당 구내에 ‘성 요셉 의원’을 개원했고, 1965년 3월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분리되면서 원주교구 소속이 되었습니다. 1966년 10월 본당 이름을 삼척에서 성내리로, 1988년 10월 성내동으로 변경했습니다. 성내동 성당은 동산 위에 있어 삼척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건립되었습니다. 1957년 3월 본격적으로 성당 건축을 시작했는데, 설계도는 춘천교구장 퀸란 주교가 보내왔고, 시공은 강릉 임당동 성당과 묵호 성당을 시공한 경험이 있는 중국인 신자 가(賈)씨가 맡았습니다. 여러 어려움 중에 공사를 마무리해 1957년 11월 5일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건평 133평의 성당과 30평의 사제관은 당시 춘천교구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성내동 성당은 1950년대 후반의 지방 건축기술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2004년 12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99년 10월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진 야고보 신부 순교기념비를 건립해 축성식을 가졌고, 2009년 본당 설립 60주년을 준비하면서 삼척시의 지원을 받아 성당 정면에 시내와 연결되는 계단을 만들고, 계단과 시내가 맞닿은 곳에 광장도 조성했습니다. 2009년 11월 본당 설정 6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2010년 6월 진 야고보 신부 순교 60주년 기념 성삼 교육관 축복식, 2015년 11월 진 야고보 신부 흉상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진 야고보 신부는 근현대 신앙의 증인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가운데 한 명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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