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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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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기 → 1박2일 짧고 깊게 한국 천주교 큰 마중물 서울교구 말씀의 길, 생명의 길 도보 성지순례 서울교구 일대 신앙선조들의 발자취를 찾아 도보로 순례하며 기도하는 일정 ![]() 상품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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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주교좌성당 명동 대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교회의 상징으로 1784년 이곳 명례방에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습니다. 그 후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다음 블랑 백 주교가 종현의 땅을 부분적으로 매입하여 성당건립을 시도하던 중 신자수의 증가로 1892년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을 분가하고 코스트 신부가 성당 설계에 착수했습니다. 1896년 건립 도중 코스트 신부가 선종한 후 후임인 프와넬 신부가 성당 건축을 마무리하여 1898년 5월 29일 축성식을 갖고 한국교회의 주보인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께 성당을 봉헌했습니다. 1900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1901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 신학교로부터 받아 지하성당에 모셨고, 1909년에는 왜고개에 매장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지하성당에 안치했습니다. 1927년 백동(현 혜화동) 성당을 분가하고, 1939년 문화관을 신축하였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성당명을 종현 성당에서 명동 성당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기공 후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대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9년 초 6년여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마무리한 명동 대성당은 2010년 성당 보존과 시민에게 열린 광장 조성 및 사목 지원공간 확보를 위한 명동성당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2011년 9월 1단계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3년의 공사 끝에 1단계를 마무리하며 2014년 9월 교구청 신청사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김범우집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로 불리었고 최근에는 순교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토마스)는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범우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 또는 겨울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李檗)의 집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입교한 후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가족과 역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키고, 윤지충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으며, 스스로 교리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하였다. 김범우는 1785년 봄 명례방 집회로 집회의 중심인물이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등과 함께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집주인이었던 중인(中人)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고 지방으로 도배(徒配, 도배는 단순히 그냥 유배-귀양가는 것이 아니라 귀양 가서도 편히 있지 못하고 강제 노역이 부가된 형태의 처벌)되어 그곳에서 형벌의 여독으로 약 1~2년 후 36~37세의 나이에 선종하였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고 중구 을지로 2가 181 외환은행 앞 장악원 터 표석 자리 앞쪽을 김범우의 집 터로 보고 있다. 김범우의 묘소는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동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 있다. 이벽의 집터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은 북경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mont, 梁棟材, 1736~1812, 요셉)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세례명을 베드로로 정하고 세례를 받고 귀국, 그해 9월(음력)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2), 정약용(丁若鏞, 요한, 1762~1836)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요한), 최인길(崔仁吉, 1765~1795, 마티아), 김종교(金宗敎, 1754~1801, 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그 근처에 기념 표석을 건립했다. 표석은 현재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05 건물 ‘두레시닝(주)’ 앞 현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 인도에 세워져 있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 기념표석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곳에 설치했다. 좌포도청 터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현 종로구 단성사 일대)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 서울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으며, 중종 무렵 설치되어 고종 31년(1894년) 7월 경무청으로 개편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북산 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다. 박해 시기 수많은 신자들이 좌·우포도청에서 순교하였으나, 기록상 좌·우포도청이 분명하게 구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103위 성인 가운데 22명, 124위 복자 가운데 5명이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다. 기록상 명확하게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유대철 베드로,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다. 복자 가운데에는 1795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가 좌포도청으로 끌려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또한 기해박해 때 103위 성인 가운데 70명이 포도청에서 온갖 문초와 형벌을 받았는데, 정하상 바오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광희문 성지 광희문은 서울 성곽의 사소문(四小門: 홍화문, 광희문, 소덕문, 창의문으로 사대문 사이에 세웠던 문) 중에 동남 방향에 있는 성문으로,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다. 본디 수구문은 서소문과 함께 도성 안의 시체를 성 밖으로 운반해 내던 곳으로 송장 또는 시체의 문이라는 뜻에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이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왔고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광희문 밖에 내다 버려졌으니 실로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1396년에 지어진 광희문은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성문 위 여장이 파괴되었다가 1976년 고증을 거쳐 복원되었는데,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졌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는 남한산성의 수구문이 있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대학로 뒤편 낙산 산등성이 위에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나갈 젊은 신학도들의 못자리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자리하고 있다. 신학교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어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과 함께하고 있다. 1855년 충청도 제천 배론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당에서 시작된 가톨릭대학교의 역사는 박해를 이겨내고 1885년 강원도 여주군 범골(부엉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2년 뒤인 1887년에 서울 용산으로 신학교를 이전하였다.
1942년 일제에 의해 용산 신학교가 강제로 문을 닫기도 했지만, 해방과 함께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하여 다시 문을 열었고, 성신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4년 가톨릭대학 의학부라는 이름으로 의학대학이 설립되었고, 1995년에는 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었다. 2015년에는 개교 1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갖고 새로운 도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석정보름우물 북촌에 있는 오래된 우물은 물맛이 좋아 궁궐에서도 사용하던 곳이라고 한다. 돌로 만들어진 이 특이한 우물은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지곤 했기 때문에 보름우물이라 불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 마티아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선교활동을 할 당시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이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 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회동성당 가회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조선에 밀입국하여 1795년 4월 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한국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이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북촌에 있던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다. 가회동은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 거점으로서 한국 초기 교회의 신앙 중심지였다. 1955년 8월 9일, 병인박해를 일으켰던 흥선 대원군의 손자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이 가회동 성당의 관할 구역인 안국동 별궁에서 임종 1주일 전에 세례받기를 원하여, 당시 보좌 신부였던 박병윤 신부에게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고 입교 동기를 밝혔다. 의친왕 이강이 죽기 이틀 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황족이 세례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순교 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것이다. 한국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터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금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 한국 교회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가까운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순간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보통 시복 미사는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 교황을 대리하여 거행하는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의 땅 한국에 와서 직접 시복미사를 집전하였다.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로 열린 시복식이었다. 2015년 8월, 124위 복자 시복 1주년을 기념하여 표석(바닥 돌)을 설치 하였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조규만ㆍ정순택ㆍ손희송 주교와 사제단이 함께한 가운데 기념 표석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터’ 축복식을 거행했다. 가로 170㎝, 세로 100㎝ 크기로 제작된 기념 표석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라는 글이 한글과 영문, 한문,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다. 기념 표석 관리는 세종로본당에서 맡았다. 형조터 형조는 조선 시대 중앙 관서인 육조(六曹)의 하나이다. ‘추관’또는 ‘추조’라고도 하였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三法司)라 부르기도 하였다. 형조는 한성부 서쪽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 9년(1785년)에 발생한 ‘을사 추조 적발 사건’으로,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신자들이 집회를 하는 중에, 금리(禁吏)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룸바, 김효주 아녜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형조 터는 세종로 세종 문화 회관 앞 버스 정류장 바닥에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 설치한 바닥돌이 매립된 자리이다. 의금부터 의금부는 조선 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으로 금부, 금오, 왕부라 부르기도 하였다. 박해 시기, 천주교 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과 군, 현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 중죄인, 곧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권철신 암브로시오가 순교한 이래, 많은 천주교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승훈 베드로와 주문모 야고보 신부, 최창현 요한 회장도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였고, 성 라우렌시오 범 앵베르 주교, 성 베드로 나 모방 신부, 성 야고보 정 샤스탕 신부, 성 정하상 바오로 등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의금부에서 혹독한 국문과 문초를 받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도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 도리 김 베드로 신부,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와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정의배 마르코 성인이 의금부에서 문초를 당하면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켰다. 전옥서터 전옥서는 형조 아래에서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던 관서였다. 박해 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103위 성인 가운데 전옥서에서 순교한 성인은 이호영 베드로와 김 바르바라이다.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이소사 아가타 성녀의 동생으로, 1835년 이소사와 함께 체포되어 1839년까지 4년 동안 혹독한 옥살이로 얻은 병으로 순교하였다. 김 바르바라 성녀도 포도청으로 끌려가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전옥서에서 3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순교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도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다. 형조 아래의 감옥인 전옥서는 1785년 명례방 사건(을사 추조 적발사건) 때 김범우 토마스가 형조에 끌려가 신앙을 증언한 이래,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한 장소이다. 우포도청터 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무렵 설치되어 1894년까지 350여 년 동안 존속한 서울의 포도, 순라 기관으로 중부 서린방 혜정교 남쪽 인근(현 광화문 우체국 자리)에 위치하였으며, 서울 서부, 북부와 경기 우도 등을 담당하였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기록상 분명히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이 있으며, 병오박해 때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가 우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혹독한 매질 아래 순교하였다. ‘기해일기’를 쓴 현석문 가롤로 성인도 우포도청에 갇혔는데, 신자들을 위로하고 순교로 나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였다. 특히 우포도청은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장소이다. 1879년 드게트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우포도청에 수감되었던 이병교 레오, 김덕빈 바오로, 이용헌 이시도로가 이곳에서 아사하여 한국천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다. 경기감영터 박해로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음에도, 점점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잡혀 온 경기 지역의 신자들은 한성 서대문 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다. 특히 가난하고 몸이 부실하며 배움도 부족했던 조용삼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신앙을 배우며 따르다가 체포되어 11개월 동안 옥에 갇혔다.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는데, 약해진 몸은 더 이상의 형벌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옥에 갇힌지 며칠 지난 3월 27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조용삼 베드로를 시복하였다. 서소문 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새남터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공식 처형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 중 신원이 확인된 분만도 1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44위가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행사를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단일 순교지로는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곳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추진한 124위 초기 순교자와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절차에 강완숙 골룸바를 비롯한 서소문 순교자 27위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었고, 이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이날 교황님은 시복미사에 앞서 서소문 순교성지를 참배하여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렸다. 중림동약현 성당(옛 약현 성당)은 1891년 서울에 두 번째 본당으로 설정되었고, 1898년에 완공된 명동 성당(옛 종현 성당)보다 6년 앞선 1892년 한국교회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완공되었다. 1905년 종탑 꼭대기에 첨탑을 올렸고, 1921년에는 성당 내부 칸막이를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였다. 1974년부터 대대적인 해체 복원공사를 통해 1977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한 취객의 방화로 소실되어 1년 6개월의 재복원공사 끝에 2000년 9월 건립 당시 원형에 더 가깝게 복구하여 다시 축복식을 가졌다. 서소문 순교성지를 품 안에 두고 있는 성당으로서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 서소문 공원 안에 1984년에 건립되었다가 1997년 철거당한 순교자 현양탑을 새로 제작하여 세웠다. 2009년 9월 13일에는 기존의 피정의 집으로 쓰던 곳을 증개축하여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다. 한편 2011년 서울대교구가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을 제안하고 정부와 지자체의 협조로 2019년 서소문역사공원(지상)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지하)을 조성해 5월 29일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성식을 거행하고 6월 1일부터 박물관을 개관했다. 중림동약현성당 한국 천주교회 200여 년의 역사 중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 100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성당이며, 한국 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순교자들의 피와 44위의 성인을 탄생시킨 신앙의 못자리인 서소문 밖 순교 성지 주변에 세워진 성지 순례 기념 성당이다.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된 뒤 서울에서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자 1887년에 블랑(Blanc, 白圭三, 1884~1890, 요한)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레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여 강당을 짓고 교리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었다. 1890년에 이르러 문밖 공소가 문안 본당(종현, 지금의 명동)을 능가하게 되었다. 문안이 586명이요, 문밖이 950명이었다. 1890년 블랑 주교는 직접 맡아보던 종현 본당을 두세(Doucet, 丁加彌, 1853~1917, 가밀로) 신부에게 맡겼고, 두세 신부는 블랑 주교가 별세한 뒤 새로 부임한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문밖에 새 본당을 증설할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이를 위임받은 두세 신부는 이미 매수한 대지에 1891년 10월 27일에 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부주교이던 코스트(Coste, 高宜善, 1842~1896, 요한) 신부는 약현 성당을 설계하고 직접 건축을 지도하였다. 정초식이 있은 지 1년 만에 준공되었으나 프랑스에 주문했던 종이 도착하지 않았고, 가을에 피정을 계기로 신부들이 모이는 기회에 축성식을 성대히 하기 위하여 1893년 9월 25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당이 자리 잡은 언덕이 서소문 밖 약현이었기 때문에 약현 성당으로 불렸다. 구조는 삼랑식의 약식화된 고딕 양식으로서 정면은 어칸과 협칸의 구별이 나타나지 않으며 건물이 낮은 관계로 고딕 건물의 특색인 뾰족아치를 쓰지 않고 둥근 아치를 쓰고 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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