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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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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 2박3일 알차고 거룩하게 천주교 박해 역사 속 지켜온 거룩한 신앙의 발자취 제주교구 2박3일 제주교구내 거룫한 성지를 순례하며 기도하는 일정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상품특전►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11시까지 수서역으로 집결해 주시면 수서역 미팅부터 성지 관련 안내는 물론 차량 운영이 가능한 드라이브 스루 가이드가 함께하며 편안하게 모십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출발지는 가까운 공항을 이용 제주도 공항으로 오시면 제주공항에서 미팅 합니다. ►미팅 후 제주교구 순례하는 차량에 탑승하게 되며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제주공항으로 개별 이동하시고 이후 순례 일정은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석 ) 3일차(조, 중)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불포함사항
►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수서역 까지 이동 비용은 개별 부담입니다. ►항공비용을 포함 개별 예약하신 항공 지연 결항등으로 발생되는 취소 및 변동 비용 ►추자도 입항시 기후 및 해상 안전 등의 이유로 일정 변경이 불가피한 경우 대체 일정으로 진행됩니다. 특이사항►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각 지방에 계신 신자분들이 개별적으로 항공을 이용하여 제주공항으로 집결하시면 이후 순례를 진행합니다. 쇼핑센터NO쇼핑 일정표
새미은총의 동산 ‘삼뫼소’(묵주기도 호수)는 세 개의 오름(봉우리)으로 둘러싸인 못이란 뜻입니다. 이곳은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찾아와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제주교구 사제들의 뜻에 따라 성 이시돌 목장을 세운 임피제 신부가 1992년부터 목장 뒤를 순례지로 본격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는 이 삼뫼소를 ‘은총의 동산’으로 명명하고 교구의 대표적인 순례지로 지정했습니다. 2009년 제주교구는 ‘삼뫼소’란 명칭을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변경했습니다. 새미는 주님의 은총과 순례객의 기도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이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새미 은총의 동산에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최후의 만찬까지 12개의 주요 사건을 표현한 ‘예수님 생애공원’과 삼위일체 대성당이 있습니다. 아일랜드식 켈틱 십자가 형태로 건립된 대성당 옥상에는 중심에 제단을 두고 사면에 의자를 놓아 약 5천여 명이 함께 야외미사나 행사를 거행할 수 있습니다. 대성당과 묵주기도 호수 사이에는 대형 조각상으로 재현한 십자가의 길 14처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용수성지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입니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은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제물포항을 떠나 상해로 갔습니다. 8월 17일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은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에 올랐습니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여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한 후 다시 항해를 시작해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라파엘호를 복원하여 해상성지순례를 마치고 9월 19일 용수리 포구를 성지로 선포했습니다. 항해를 마친 라파엘호는 신창 성당 마당으로 옮겨 보존하다가 2006년 11월 김대건 신부 일행의 제주도 표착과 제주도에서 한국인 첫 사제의 첫 미사가 거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관’ 앞 잔디광장으로 옮겼습니다. 2008년 9월에는 기념관 바로 옆에 성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을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2017년 10월에는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을 리모델링하고 사제관을 신축해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정난주마리아 대정성지 백서 사건으로 순교한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본명 명련) 마리아는 남편을 잃은 뒤 2살 난 아들 경한을 데리고 조선시대 중죄인의 유배지였던 제주도로 떠났습니다. 젖먹이 아들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것이었습니다.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도록 할 수 없었던 모정은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해 유배 길에 추자도 예초리에 경한을 내려놓고 뱃길 중에 죽어 수장했다고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결국 경한은 오씨 성을 가진 한 어부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졸지에 관비 신분으로 떨어진 정난주는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냈습니다.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 그리고 굳건한 믿음의 덕으로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37년을 살다가 1838년 음력 2월 병환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웃들은 정난주의 유해를 모슬포 뒷산에 묻어주었고, 1970년대 초 어렵게 묘를 찾아서 1977년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했습니다.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이자 ‘백색 순교자’인 정난주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 1994년 제주교구는 신자들의 염원을 담아 대정 성지를 조성했습니다. 추자도공소 9년 전까지 47년간 추자공소 신자들의 신앙 못자리 역할을 하던 ‘구 공소’의 건물은 관리인력의 부재로 다소 낡아 건물 보존을 위해 세를 줄 계획이 되었습니다. 현 공소는 2003년 6월 30일 봉헌되었습니다.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는 신자들은 건축헌금 마련을 위해 생선과 젓갈, 쑥 등 돈이 되는 것들을 제주도와 육지에 내다 팔아 1억 원 이상을 모았고 지하 1층, 지상 2층의 어엿한 새 공소를 갖게 됐습니다. 구 공소에 녹슨 채 방치되던 종의 녹을 벗겨내고 기름칠을 해 현 공소에 설치했고 오전 6시, 낮 12시, 오후 6시 어김없이 삼종을 치는데 종소리는 추자도 거의 전역에 울려 퍼져 신자들은 일손을 멈추고 기도를 드립니다. 비신자들에게는 밀레의 ‘만종’ 역할을 합니다. 섬 주민들은 은은한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생각합니다. 황경한의 묘와 눈물의 십자가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하추자도에는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습니다.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은 1790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을 낳았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황사영이 체포되어 순교한 후 부인은 제주도에 관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젖먹이 아들마저 평생을 죄인의 자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어머니 정난주는 유배 길에 호송선의 뱃사공과 나졸을 매수하여 경한을 하추자도 예초리의 갯바위에 내려놓았습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져 그의 아들로 키워졌습니다.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았고, 그 후손이 지금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습니다.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를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고, 상추자도에 있는 추자 공소 신자들이 묘소를 돌보고 있습니다. 김기량펠릭스 현양비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어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났습니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인 5월 31일 루세이유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과 사공들에게 돌아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5년에 두 번째 난파를 당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 신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무사히 귀국한 후 육지로 나와 리델 신부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되었습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통영의 게섬에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습니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결국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했고, 특히 김기량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때가 1867년 1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습니다. 제주교구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 김기량 순교비를 세웠고, 2003년 1월 조천 성당에도 순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2005년 4월 24일에는 그의 고향인 조천읍 함덕리의 함덕 중학교 서쪽 도로변에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 현양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시복시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마침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관덕정 1886년 한불조약을 계기로 공식적인 박해 정책은 막을 내렸지만 유학적 전통이나 인습에 젖어 있던 지방에서는 소규모 사건들이 빈발해 어떤 사건은 그 규모가 공식적인 박해를 능가하는 예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즉 부패한 관리와 완고한 유생들에 의한 천주교인들과의 충돌이 결국에는 박해라는 양상으로 바뀌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중 하나가 1901년에 발생한 제주도 ‘신축교안’입니다. 신축교안은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는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습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습니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했습니다. 제주 주교좌 중앙성당 1899년 4월 22일 설립되었으며, 초대 신부는 페네 가롤로 신부가 부임하였습니다. 제주도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를 피해 제주도로 피난온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이후 풍랑으로 홍콩에서 구조되어 천주교에 입교한 1858년 제주 출신의 김기량(金耆良)이 귀국하여 이웃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는데 그는 병인박해(炳寅迫害) 때 체포되어 통영에서 순교하였습니다. 1898년 조선 대목구장 뮈텔(G. Mutel) 주교가 부임하여 제주도 본당 설립을 추진되었고 이듬해 제주 본당이 설립되었습니다. 황사평 성지 1901년 제주에서 발생한 신축교안은 1900년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이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해 온갖 잡세를 거두는 수탈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으로 출발했습니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하고 민군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습니다. 이에는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한 것도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인 신부를 쫓아내고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던 일본제국주의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세력,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린 일부 신자들의 무리한 행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신축교안은 유서 깊은 관덕정 앞을 사형장으로 만들었습니다. 제주읍성을 함락한 민군은 천주교인을 포함한 양민 수백 명을 살해했는데, 170여 명의 신자들이 관덕정 정자 앞에서 모진 매를 맞고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공식적으로 집계된 희생자 명단 등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신축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대략 300-35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교우들의 시신은 별도봉 기슭에 가매장되었다가 1903년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아 이장했습니다. 이때 황사평으로 이장한 무연고 묘와 시신의 수는 합장한 묘를 합해 총 26기에 28구였습니다. 총 면적이 약 18,000평의 황사평은 현재 신축교안 순교자 묘역뿐만 아니라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80년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으로 이장했다가 1995년 11월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28구의 유해를 합장하여 순교자 묘역을 새 단장하고 교구 성직자 묘지를 조성했습니다. 1998년 제주에서 활동한 외국인 성직자들을 기리는 공덕비와 제주 출신 최초의 신자인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비를 세웠습니다. 2008년 제주교구는 황사평 순교자 묘역 앞에 납골당 건설 작업에 착수해 아름다운 추모공원을 조성했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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