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성지

일본성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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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프란치스코 자비에르(하비에르)성당


히라도의 상징인 히라도 성당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히라도 선교를 기념해 1931년에 건립한


성당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은 주첨탑을 작은 첨탑들이 둘러싸


고 있는 독일식 고딕양식 건축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고딕양


식으로는 보기 드문 비대칭 건물로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만 팔각 탑이 보여 불가사의한 매력을 주기


도 합니다.
 


히라도 구치(구지)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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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도구치에는 메이지시대 중기부터 구로시마, 고토열도, 소토메, 히라도 등에서 신자들이 이주하였


습니다. 다비라 성당의 초대 주임사제인 나카다 도키치 신부가 사회복지를 위해 세웠던 히라도구치사


회관의 2층을 1947년 근처 신자를 위해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으며, 1952년 골로반회의 그리니 신


부에 의해 현재의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타비라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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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도 해안가 언덕에 자리잡은 타비라 성당역사는 메이지 19년(1886년)에 라게 신부가 구로시마에


서, 드로 신부가 데즈에서 숨어지내던 가톨릭 신자 몇 가족을 타비라 요코타데로 이주시키면서 시작


됐습니다.


나카타 도우키치 신부가 1914년 주임으로 부임한 후 1916년 성당 건축 공사를 착공, 1918년 5월 14


일 완공해 일본 26위 순교자에게 헌당했습니다. 타비라 성당 건립 공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인


독지가에게서 기부를 받아 착공했지만 자금부족으로 나카타 신부와 신자들이 노력 봉사를 해야만 했


습니다. 석회를 구입할 돈이 없어 히라도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개껍데기를 구워 갈아 석회 대신 사


용하기도 했습니다.


후기 벽돌조 양식의 타비라 성당은 일본의 저명한 건축가 데쓰카와 요스케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종탑에는 1931년 프랑스에서 도입한 '천사의 종'이 설치돼 있으며 성당 좌우측 창에는 성경


내용을 주제로 한 색유리화가 장식돼 있습니다



야이자 사적공원(카미로 콘스탄치오 신부 순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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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였던 카미로 콘스탄치오 신부는 1605년 일본에 입국해 선교활동을 하


다가 1614년 금교령으로 마카오로 추방되었습니다. 그 후, 1621년 재입국하여 우레시노, 가라쓰, 히라


도 영내에서 선교활동을 하였고, 고토열도의 최북단인 우쿠섬에서 체포되어, 다비라에서 화형을 당하


였습니다. 카미로 콘스탄치오 신부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히라도 항에 입항해 있는 영국과 네덜란드


선원에게도 영어와 네덜란드어 등으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야케자’라고 불렀던 땅이 바로 처형지


입니다.



도자키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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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고토의 관문인 후쿠에 항 근처 아름다운 바닷가에 자리한 도자키 성당은 일본 교회가 신앙의 자유


를 되찾은 지 7년만인 1880년 고토열도에 처음 세워진 성당입니다.


도자키 성당에서 유난히 눈에 띠는 것은 스테인드 글라스에 피어있는 동백꽃인데, 로사리오를 의미하


는 장미를 본적이 없던 고토 신자들이 고토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동백꽃으로 장미를 대신했다지만,


동백의 단단한 열매는  견고한 신앙심, 꺾이지 않는 의지의 순교자들과 더욱 닮아있는 듯합니다.


무엇 하나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신자들은 밥그릇 바닥에 십자가를 새겼고, 낯선 관음보살상을 놓


고 동자에는 예수를, 관음보살에는 성모마리아를 투영시킨 마리아 관음이라는 특이한 상징물을 만들


어내기도 했습니다.


도자키성당은 1974년 나가사키현의 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1977년부터는 고토 그리스도인의 수난사


를 전하는 자료관이 됐습니다.



미즈노우라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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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우라성당의 역사는 18세기 말 오오무라한에서 이주하여 온 잠복 키리시탄 가운데 5명의 남자


와 그의 아내들이 주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불교도를 가장하고 몰래 그리스도교를 믿었습니다.


1866년 무렵 카미고또-의 신자가 미즈노우라에 와서 나가사키오오우라에 키리시탄의 성당이 서 있다


는 것을 알려주어 그 해 11월 8일 미즈노우라의 쵸오가다(신자 대표)등 세 사람이 나가사키에 가서 프


치쟌 주교를 면접하고 기적패랑 십자가를 얻어갖고섬에 돌아왔습니다.


1868년 12월 25일 미즈노우라의 키리시탄들이 쵸오가다의 집에 모여 기도 드리고 있는데 관리들이


덮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4~5일 후30여명의 남자들이 잡혀서 임시로 만든 옥사인 쵸오가다의 집에


갇혔습니다. 태반의 신자들은 1869년 옥에서 풀려났지만 주요한 8명은 2년 넘게 옥에 갇혀 있었습니


다.미즈노우라 신자들은 금교의 방이 철거되고 7년 후인 1880년에 미즈노우라만이 한눈에 내려다보


이는 작은 언덕위에 최초의 성당을 건립하였습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성당은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노후화되어 재건축하기에 이르렀으며


현재의 미즈노우라 성당은 1938년 명장 테츠가와요스케의 설계 시공으로 당시 운젠에 세울 예정이었


던 성당이 사정에 의하여 취소를 하게 되어 그 자재를 그대로 매수하여 건축하였습니다. 승천하신 성


모님께 봉헌된 백악의 우미한 성당입니다



미이라쿠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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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라쿠 성당은 외벽 정면의 도기로 그려진 큰 모자이크성화(테마는 여러성인)와 내부의 스테인드글


라스의 아름다움이 대단히 인상적인 성당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이 고장 미이라쿠 출신의 독지가


가 비용을 부담하고 이 고장의 봉사자 그룹에 의하여 수년 걸려서 제작되어 2005년에 완성한 것입니


다.  이 지역의 키리시탄 역사는 1772년 70명의 농민이 후치노모토에, 다음해인 1773년에도 많은 이


가 미이라쿠에 이주하여 오는데서 시작되었고 그 3년 후에는 78명이 후치노모토에 주거를 정하고 있


습니다.  1839년에는 나가사키 우라카미의 2번째 박해에서 방면된 신자 일부가 미이라쿠(다케마을)에


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1868년 히사까섬에서 시작된 키리시탄 박해는 미이라쿠에도 미쳐서 신자들은


탄압을 참고 이겨내어 배교자나 사망자를 내는 일 없이 태반이 1개월 정도에서 옥에서 풀려났고 일부


의 신자는 투옥된 채로 있다가 1871년이 되어 전원이 방면되었습니다.


1880년 현재의 부지에 고딕양식으로 목조의 성당을 지었으며, 그 후 세월이 경과하면서 필요에 따라


대수리를 하였고 신자의 증가에 대응하기 위하여 증개축을 거듭하였지만 건축에서 90년후인 1970년


흰개미에 의한 피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체하게 되었습니다. 해체 다음해인 1971년에 새 성당을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가이쓰 성당


카이즈 성당의 역사는 오오무라한에서 미이라쿠의 후루다라던가 타마노우라쵸 돈도마리로 이주하여


온 잠복키리시탄이 그 후 타케야마 마을로 다시 이주하여 온데서 시작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 하사까섬에서의 박해가 미이라쿠에 미치면서 카이즈의 신자들도 하마노아제의 지방관리


의 집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습니다. 금교의 방 철거에서 반세기후인 1924년 당시 40호의 신


자들에 의하여 목조의 현교회가 건립되어 사도 성 요한에게 봉헌되었습니다. 카이즈교회는 다케(현재


미이라쿠) 소교구의 공소로 발족되었는데 당시의 신자 대부분은 타케야마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성당이 건립되기 전에는 같은 부지에 10평이 좀 못되는 옛 성당이 있었는데 대단히 좁고 사제


가 순회할 때에는 신자가 성당 밖에까지 넘쳐났다고 합니다.


1952년 다케소교구에서 독립하여 카이즈소교구로 되었으며 현 성당은 1962년 건물의


노후화 때문에 대폭적인 증개축이 이루어지면서 삼각지붕의 작은 첨탑이 새롭게 덧붙여진


것입니다. 창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빨강, 파랑, 초록의 선명한 빛은 소박하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성당 공간을 예술적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성당안의 제단에


는 구색 맞춘 계절의 꽃이 장식되고 있어 엄숙한 가운데에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온을 느


끼게 합니다.



운젠순교 기념성당 (복자 안토니오 이시다와 동지 순교자)


1627년부터 1632년에 걸친 탄압으로 ‘운젠 지옥’에서 순교한 안토니오 이시다를 추모해 만들어진 교


회입니다. 또한, 1981년 6월 15일 사토와키 추기경에 의해, 교황 요한 바오로2세의 나가사키 방문과


나가사키 대주교구 요셉 사토와키 추기경의 사교은경축을 기념하기 위해 1981년 한국 가톨릭교회에


서 지어 주었습니다. 운젠교회의 신자는 14명에 불과한 적은 숫자이지만, 국립공원 내에 교회가 건립


되어 있는데다, 순교지라 많은 순례자나 관광객들로 일 년 내내 순례객들로 붐빕니다.



운젠 지옥계곡 순교지


유황 냄새로 가득한 운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톨릭을 탄압하기 위해 신앙을 가진 신자들을 고문


화 처형 장소로 이용한 순교지입니다. 1627년부터 1632년에 걸쳐 계속된 시마바라 영주 마츠쿠라 시


게마사의 탄압을 일컫는 지옥고문에 의해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습니다. 오이토 지옥에 순교한 사람을


기리는 두 개의 기념비가 있는데, 하나는 1939년에 나가사키현에서 건립한 성화가 불타오르는 비이


며, 가인 이쿠타 스케의 붉은 철쭉꽃 가득한 산은 ‘지금도 여전히 성스러운 피가 불타오르는 듯하구


나’라는 시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1961년에 나가사키 대주교구에서 건립한 곳으로, 대형


십자가 받침대에는 6명의 복자 순교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우라 성당


오우라성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성당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26 성인


순교자 성당이며, 이 곳이 처음 생겼을 때 나가사키 주민들은 이곳을 ‘프랑스 절’이라 불렀다고 합니


다. 지금있는 건물은 원폭투하 후 무너진 성당 건물을 재건한 것이지만 그 가치가 높아 보물로 보호


받고 있습니다. 이 곳은 프랑스 신부님이 만들었는데 그 신부님이 우라카미의 숨어 있는 기리시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기리시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가사키로와 성당을 짓기 시작했습


니다. 성당을 지어 놓으면 숨어 있는 기리시탄들이 하나 둘 찾아오리라 생각했으나 찾아 오지 않았고


신부님은 기리시탄을 찾기 위해 나가사키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성가를 부르기도하고 신부라는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썼으나 신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산타마리


아’가 있다는 소문이 조금씩 퍼지고, 어느날 한 여인이 신부님을 찾아와 “우리는 당신과 같은 마음입


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반복해서 물으니 그 여인이 “산타


마리아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그래서 신부님은 기리시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성당 안


으로 데리고 들어가 “당신이 찾는 산타마리아가 이것입니다”하고 성모상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기리시탄을 찾아내기 위해 가짜 기리시탄들도 있었기 때문에 이 외국인이 자신들을 돌보아


줄 수 있는 사제인지를 다시한번 확인하기 위해 또 질문을 했습니다. “ 당신은 결혼을 했습니까?”하고


물으니 신부님은 “나는 가톨릭 사제로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고, 마지막으로 그 여인은


“파파(교황님)를 아십니까”라고 묻자 신부님은 “우리 사제는 주교님의 파견으로 이 곳으로 오지만 교


황님을 받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하였고 그 이후엔 경계를 풀고 우라카미에 신자들이 있고, 당신


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라덴신학교


1873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75년에 완공된 일본 최초의 신학교이며 국가지정 중요문화재입니다. 지


금은 천주교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소장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신부 성모기사회


성모님의 성화 앞에서 기도하던 한 소년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러자 소년은 성모님께 “성모


님, 저에게 뭘 주시겠어요?”라고 청합니다. 성모님은 흰 꽃이 그려진 왕관과 붉은 꽃이 그려진 왕관을


보여주시며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고민하던 소년은 결국 “두 개 다 주세요.”라고 욕심스럽게 답합니다.


이렇게 어릴 적 욕심처럼 순결의 흰 왕관과 순교의 붉은 왕관 모두를 쓰신 성인이 막시밀리아노 마리


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신부입니다.


콜베 신부는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인 부부 율리오 콜베와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


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직후 ‘라이문도’라는 세례명을 받은 콜베는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


릴 적부터 강한 성모님 신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1911년


18세에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형 프란체스코와 함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였습니다. 그리


고 그해 11월, 막시밀리아노라는 새로운 이름의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1912년에는 로마로 유학을 가


게 되었고, 학업 중인 1917년 로마에서 동료 수사 6명과 함께 성모기사회를 창설합니다. 1918년 사제


서품을 받고, 다음 해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 해 9월에 폴란드로 귀국하여 교수생활을 하다가,


10월에는 본격적인 ‘성모기사회’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922년 1월에 콜베 성인은 잡지 ‘원죄 없으


신 성모기사(1935년 70만부 발행, 1949년 100만부 발행)’를 창간하였으며, 1927년 10월에는 ‘원죄 없


으신 성모마을(니에포칼라누프)’를 건설하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 학생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콜베 신부는 동양 선교에 대해 사명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1929년 12월 30일 폴란드를 떠나 이듬해 4


월 2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도 그는 ‘성모의 기사’를 발행했으며 활발한 선교활동


을 벌였습니다.  6년 후, 콜베 신부는 폴란드에 있는 성모의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귀국했습니다.


이즈음은 나치 독일 의 침략 야욕이 가시화되던 시기였기에 그는 전쟁으로 인한 심한 박해와 시련,


특히 자신의 고난을 자주 예고했다고 합니다. 결국 1939년 9월 나치 독일 군대는 폴란드를 점령했으


며, 콜베 신부는 1941년 2월 17일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사실 체포된 실질적인 이유는 그가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 발행자로서 폴란드 국민


에게 커다란 영향력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5월 28일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


고 불리던 ’오센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콜베 신부는 사제이기에 더욱더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지만 결코 평온함을 잃지 않


았으며 자신이 더 어려우면서도 오히려 절망하고 있는 주위의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


습니다. 또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설교와 면담을 해줌으로써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 데 전력하였습니다. 그러다 때로는 발각되어 심한 구타와 고문으로 몸이 망가져 갔


지만, 수용소 안에서도 그의 사제직무 수행은 불굴의 의지로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훗날 순교로 꽃을 피웠습니다.


수용소에서 한 죄수가 탈출에 성공하는 일이 발생하자 화가 난 수용소장은 자신이 세운 규칙을 내세


우며 탈출한 사람이 속한 감방의 수감자 중 10명을 굶겨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무작위로 선택된 10명


중 한 사람,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는 자신의 가족들을 보고 싶다고 소리치며 울부짖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감자 중 한 사람이 대열에서 나와 그 사람 대신 굶어 죽겠다고 자원한


것입니다. 그가 바로 콜베 신부였습니다.


콜베 신부는 인간이 세운 가장 사악한 곳 중 하나인 아사 감방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정복하였습니


다. 그는 다른 9명의 수감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수감자들은 굶주


림 속에 고통당하면서도 콜베 신부와 함께 죽음의 자리를 찬미의 자리로 바꾸었으며, 콜베 신부의 병


자성사와 함께 하느님 품에 안겼습니다. 마침내 콜베 신부를 포함한 4명만 남게 되었을 때 나치는 독


약 주사를 투약하였습니다. 이렇게 콜베 신부는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그 날은 1941년 8월 14


일이었고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이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시복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으며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습니다.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는 수감자들의 주보성인입


니다.



여기당


1948년 원폭에 쓰러진 사람들을 치료한 의사 나가이 다카시를 위해서 사람들이 지어준 집으로서, 다


다미 2장 크기이고, 책장과 침대만 달랑 있는 집입니다. 나가이 박사는 이 집에서 우라카미 성당을 향


해 기도했다고 하며, 박사는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如己愛人)"는 의미로 이 집을 뇨코도(如己


堂)로 이름 짓고 두 아이와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쟁의 어리석


음, 핵무기 반대, 평화의 귀중함, 이웃 사랑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일본 26 성인 순교지 기념관(니시자카의 언덕)


니시자카는 일본에 있어서 나라의 명령에 의해 처형된 최초의 가톨릭 신자의 순교지입니다. 에도시대


초기 많은 가톨릭 신자가 처형되었으며 최초에 처형된 26인의 순교자는 2862년에 성인에 시성되었습


니다. 1864년 외국인 거류지에서 성지 니키자카에 향해 일본 26성인순교자 ‘오우라 천주당’이 지어졌


으며, 26인 순교자가 시성된지 100주년 기념비와 기념관 및 성당이 ‘성지 니시자카’에 세워졌습니다.



우라카미 성당


우라카미는 많은 기리시탄이 신앙을 지켜낸 지역의 하나로써, 그리고 원폭이라는 수난을 받은 땅으로


써 평화를 생각하는데 있어서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곳입니다. 우라카미의 신자들은 4차례에 거듭된


박해에서도 신앙을 지키며 오랜 세월을 견디어, 1873년(메이지 6년) 다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고


1900명의 신자들은 이전에 초상밟기(후미에) 등의 기리시탄 탄압이 행하여진 촌장집의 부지를 사들


여서 그곳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후 1895년 후레노신부의 지휘아래 신자들은 천주당


건설에 착수를 합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 신자들의 노동봉사에 의해 건설을 진행하지만 자금난이


계속되어 천주당은 미완성인 채로 1914년에 성당 봉헌식을 올렸습니다. 1925년 휴-제신부가 쌍탑을


붙이고, 프랑스에서 가져온 안제라스의 종을 달고서 겨우 완성합니다.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규모에서 “동양에서 제일”이라고 각광을 받는 천주당이 되었지만 불과 20년 후 원폭에 의하여 많은


인명과 함께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전후에 그 폐허를 원폭 유물로써 보존하고 싶다는 희망이 원폭자


료보존회에서 제안되고 여론도 흔들렸지만 우라카미 교회로써는 신자들의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같은


장소에 재건하는 것만이 의의 있는 것 이라 해서 폐허의 일부를 옮겨 보존하고 1969년 새 성당을 그


자리에 건립하였습니다. 250년 동안이나 신앙을 지켜오고 기리시탄의 부활도 우라카미의 신도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의하여 실현된 것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성당으로써 1962년 오우라 천주당을 대신


하여 주교좌성당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의 교회는 1980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내일하는 전년


에 개장공사가 완성되어 외벽에 벽돌타일을 붙인 성당입니다. 이전에는 동양제일이라고 불리면서 원


폭으로 파괴된 구 우라카미 천주당을 방불케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되살리고 있다.



씨사이드모모치 해변


1989년에 열린 아시아태평양 박람회-후쿠오카89의 박람회장으로 사용되던 장소를 현재 산뜻한 공원


으로 재단장하여 바닷가에는 길이 2.5km, 면적 53ha 의 인공해변이 조성되어 인공해수욕장과 해변공


원으로 탈바꿈되었습니다. 외관이 8000여장의 유리로 이루어진 후쿠오카 타워, 일본 최초로 인공지반


위에 세워진 리조트 시설인 마리존등 해변 공원 내 볼거리, 즐길거리가 많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


는 명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