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성지

유럽이스라엘성지 소개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사원(아야 소피아)은 톨카프궁전 앞에 있는 적갈색의 건물로 동로마 제국 시대 그리스 정교


의 본산지인 성당이었습니다.


그 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점령하여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


교 이들 두 종교가 공존하는 박물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원의 내부에는 비잔틴 문화를 상징하는 다


수의 모자이크 벽화가 남아 있는데 그리스도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모자이크벽화나 휴스티야누


스 대제가 화려하게 묘사된 그리스도 좌상은 특히 유명합니다.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벽화는 콘스


탄티노플이 1453년 오스만터키에 의해 함락되면서 모두 옻칠로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첨탑과


미흐라브(Mihrab,메카의 방향으로 움푹 패인 곳)가 더해져 이슬람교 사원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1931년 미국 고고학 조사단에 의해 숨격진 벽 안의 모자이크화가 발견된 후 성 소피아 사원은 비잔틴


시대의 최대 유적으로 또다시 각광 받고 있습니다.


 
블루 모스크 (술탄아흐메드 모스크)


터키를 대표하는 사원이며, 사원의 내부가 파란색과 녹색의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 때문에 '블루 모스


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습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제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가 1609년에


짓기 시작하여 1616년에 완공했습니다. 우뚝 서 있는 첨탑 6개는 술탄의 권력을 상징하며, 이슬람교


도가 지키는 1일 5회의 기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사원 앞의 정원에는 언제나 화사한 꽃이 피어 있어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합니다.



코라 구세주 성당


코라 구세주 성당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성박에 세워졌습니다. '교외', 도시 근교의 '시골'


을 뜻하는 그리스어 Chora의 발음이 변하여 카리예(Kariye)로 불리게 되었고, 현재는 카리예 박물관


(Kariye Museum)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아시아 대륙 끝 위스크 다르에 위치한 코라 성당은 558년


의 대지진때 완전히 파괴되어 유스티아누스 황제(Flavius Petrus Sabbatius Iustinianus, 527-565년)가


개축하였습니다. 현재 성당의 원형은 비잔틴 왕조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소(Alexios,Komnenos,


1081-1118)의 장모 마리아 듀카스(Maria Dukas)에 의해 1077-1081년에 세워졌습니다.


그 후 안드로니코스 2세의 총리 테오도레 메토키데스(Theodore Metochites)가 1315-1321년 수도원


을 수리하고 현관과 부속경당을 증축하여 내부의 천정과 벽에 성경의 내용을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


로 장식했습니다. 특히 테오도레 메토키데스가 예수님께 성당을 바치는 모자이크도 남아 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된 이후 탄압으로 파괴되고 개축되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건축가 시난이 성당의 중력을 지지할 목적으로 16세기


에 네 개의 미나레(Minaret, 이슬람 사원 첨탑)를 외부에 세웠는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당


에는 중앙(Naos)의 메인 돔을 포함해 5개의 돔이 있고 성당 중앙(Naos)은 내부 나르텍스(Narthex, 출


입문에서 성당 중앙으로 연결되는 현관 홀)와 연결됩니다. 중앙 문을 통과하면 내부 나르텍스 (Esonar


hex, 성전 중앙으로 들어가는 내부 입구, 폭4m, 길이18m)가 있는데 구조적으로 내부 나르텍스는 창을


만들 수 없어 볼트 (Volt, 비닐하우스 형태) 형 천장에 두개의 돔을 만들어 돔과 볼트 사이에 채광창을


만들었습니다. 이 채광창을 통해 돔 천장의 황금빛 모자이크에 반사되는 빛은 경외감과 신비감을 자


아냅니다. 외부 나르텍스(Exonarthex, 전체 건물 외부 입구, 폭4m, 길이23m)천장에는 모자이크로 된


성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슬람 정복 이후 성당 내부에 있던 성경의 중요 내용을 그린 아름다운 모자


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회반죽을 덮여 이슬람 사원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었으나 1948년 이후 복원되


어 건립 당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속경당의 <최후의 심판>, <부활> 등


모자이크와 벽화는 비잔틴 후기의 명작으로 순례자들의 경외감을 자아냅니다.


 
에페소 (Ephesus) -現엘주크(Selcuk)


에페소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점의 비문에 의존하지만 도시의 기원 에 대한 정획한 지식은 알 수 없습니다. 역사에서 에페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서|기경의 힛타이트(H?tt?te)성경의 햇족속 비문에서인데 그 비문


에는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기원후 1세기에 에페소는 그리스도


교인들에게는 중요 도시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기 37 - 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 이 에루살렘에서 주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오로는 그의 저12자와 3자 전도 여행 때 에페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빌리고 교회를 세우


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 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64년 사도 바오로가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


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페소의 그리스도교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베르가


모, 스미나르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몰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 모섬으로 유배


를 당해. 이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썼다.   로마 횡제 도미티안 (Dom?t?an)이 피샅당하자,요한도 유배


에서 풀려나 에페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페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 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서|기에 들어와 에페소는 다


른 지증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키인


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에페소는 지진으로 횡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박해의 문


이 문은 요한의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대부분 을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야수


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겼던 3-4 세기의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제


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그리스도 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서 그 대리석들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의도는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사도 요한의 교회


4세기경 기독교가 공인되고, 에페소에 그리스도교 가 널리 전파되자, 그의 무덤이 있던 자리에 목재로


된 교회가 건립되었다.  그 후 비잔틴 저|국의 유스티안 황제가 (527 - 565)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의 교회로 증축시켰다. 교회의 심장부인 본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이곳에 요한의 무덤


이 있다. 
 
 
성모 마리아 교회


이 교회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431년 이곳에서 제3차 공의회가 열


려 그리스도교 교리를 토론한 것이다.  네스토리우스(Nestor?us는) 안티오키야 교회에 있을 때부터 동


정녀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인 에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약 200명의 권위자들이 3개월간 토론끝에 Nestorius의 견해는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이 회의


록에는 성모 마리아가 에페소에 왔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묻혔다는 문구가 남아 있어서 사실


을 획인 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마리아의 집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죽기 전 요한을 가리키며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나이


다’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리켜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요한옥음 19장


26-27절) 그러하여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로 오게 되며 3차 공의회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마리아에게 산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어 찾을 길이 없었다. 1878년 캐더린(Catherine)이라고 하는 독일수녀가 물속에서 계시를 받


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속에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


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 번도 떠난 일이 없었으므로 1891년 나자렛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집터 모양은 캐더린이 계시를 받아 기록한


모습과 정획히 일치하였다. 1961년 교황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


을 성지로 공식 선포 했다.


 
스마르냐 (Smyma)- -현.이즈마르(IZIIJUR)


이즈미르는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은 터키 제3의 도시이다. 또한 서사시인 호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


다. 에페소, 파묵깔레, 셀주크 등으로 연결되는 에게해 연안의 교통 요충지이며,고대에는 스미르나로


불리며 무역항구로 발전하였다. 1922년에는 그리스와 벌였던 전쟁에서 화재로 파괴되고 말았으나 바


로 재건되어 지금과 같이 아름답고 현대적인 도시로 바뀌었다.


B.C3,000년부터 형성된 항구도시로서 알렉산더대왕이 이곳에 주둔하였고, 산위에 성채를 건설하였다.


스미나르는 기원전 27년 로마와 합병되면서 크게 번성하였고 항구 상업도시로서 해외 거주 유대인들


이 이곳에 많이 쓸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초대교회를 핍박하였고(계 2:9-10) ‘유대인들의 훼방


’에 관한 언급을 이해할 수 있다... 묵시록의 저자는 스미나르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선동으로


박해를 당하리라고 예고하면서 그럴 때 일수록 신앙에 충실해서 구원을 받으라고 훈계를 했다.


폴리갑 교회 사도요한의 직계 제자였으며,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폴리갑(Polycarp 69-155년


생존)은 115- 116년까지 스미나르 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스미나르에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필라덜피아 등지에서 잡아온 11명의 그리스도교인들


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시켰다. 이때 폴리갑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친구를 샅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말했으나 "86년간을 나


는 그분을 섬겨왔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


고 하란 말인가?"하고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 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


났다고 선언 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아버지다’라고 외


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이즈미르에는 주교님의 순교 기념


대주교좌 성당 이 있다.
 


라오디게아 (Laodicea) - 現 라오디케이다 (laodikeia)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렉산더가 죽은 후 시리아 셀레우코스(5eleucid)왕가의


안티오쿠스2세(Antiochus-기원전 261년-252년 재위)가 그의 부인 Laodicea의 이름을 따서 도시이름


을 라오디게아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폴리스의 온천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


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야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


다. 요한 묵시록의 작가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묵시 3


13-22) 이곳 교우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 여행 중(53년-58년경) 에페소에서 27개월 가까이 머물때 그의 제자 골로사이 줄신 에바프라는


에페소에서 동쪽으로 450여리 떨어진 곳에 골로사이 교회(골로 1 6-1) 와 히에라폴리스와 리오디게아


교회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비잔틴제국은 13세기까지 이곳을 방어하다가 셀주크 투르크족에게 삐


앗기고 말았다. 1710년과 1899년의 대지진때 파괴된 이곳을 1961년-1963년 캐나다 퀘벡시의 라빌대


학교 고고학팀의 발굴 작업으로, 로마식 야외 운동장 (5tadium)과 두개의 큰 야외 원형경기장 터가 발


견되었다. 아직도 유적 부분이 땅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필라델피아 (philadelphia) - 現 아라쉐헤르(Alasehir)


사르디스에서 동남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옛날의 필라델피아, 지금의 아라쉐히르 읍내가 있다.


한 묵시록의 그리스도께서는 일곱교회 가운데서 오직 스미나르 교회와 더불어 필라델피아 교회만


나무라시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오히려 칭잔하셨다. 14세기경 주변이 전부 오스만 투르


크군에게 점령당했으나 필라델피아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자체방어를 하더니 1379 년 비잔틴 횡제


요한5세와 오스만 투르크 슐탄 뮤라트1세간에 정치적 거래로 오스만저제국에 편입되었다 B.C 159-


138 베르가모의 왕 Attalus 2세,Phi ladelphus에 의해서 이도시가 세원졌다. 그의 이름을 따서 필라


델피아로 올리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 베르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 사이에 위치


하고 있어 이들을 잊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산업이며, 농


산물로는 포도를 재배하였다. 그래서 필라덜피아 교회에서는 소아시아내의 300여개 교회의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공급하였기 때문에 형제사랑을 실천한 교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A.D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대파되었다. 오늘날 비잔틴 시대에 세운 교회터가 남아 있는데 3개의 큰 기


둥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 가고 있다.
 


사르디스 (Sardis) - 現 샤르트(Sart)

아키디르(티아디라)에서 남쪽으로 70km 지점에 리디아 왕국(기원전 680 년- 546년 경)의 수도였던 사


르티스 폐허가 있다.  티아디라에서 62km 지점에 있는 살리흘리 읍내를 거쳐 사르디스에 도착하면 국


도 오른편에 웅장한 체육관이 보인다. 서기 193년-235년에 세운 체육관인데 다 무너진 것으로 하버드


대학과 코넬대학 고고학팀이 1985년-1993년 사이에 발굴 복원 했다.. 체육관 옆에 있는 4세기 말엽의


유대교 회당은 유대인들의 경제적인 도움으로 역시 같은 팀들이 복원 했다. 무엇보다도 트몰로스 (해


발 2,317m)산 아래 자리 잡은 아르메데스 신전이 장관이다. 에페소의 아르메데스 신전이 더 크다고


하지만 조석은 늪 속에 묻혀 있고, 형체는 거의 사라져 버린데 비해 이곳은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편


이다. 이 신전은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 대왕의 명으로 짓기 시작하여 끝내 마치지 못한 미왼성 신전


이다. 큰 돌 기둥 78개가 숲을 이루는 이 엄청난 석조물을 오른쪽 귀퉁이에 비잔틴 시대에 세운 작은


성당이 붙어 있다.  사르디스 주교로 가장 알려진 주교는 부활론을 집필한 멜리토(190년경 사망)이다.


그는 유대 윌력에 따라 나산달 15일 부활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이는 윌요일에 예수 부활 축일


을 지낸 서방교회와 오랫동안 전례상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멜리토는 예수께서 ’본섬으로 하느님이시


오 사람이시라다는‘라는 정통 그리스도론을 주장 했다.  멜리토 성인의 축일은 4월 1일이다.
 


티아디라 (Thyatira) - 現 아키샤르 Akhisar)


베르가모와 사르디스를 잊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B.C 300년에 5eleucus 1세에 의해서 세


워진 도시이며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사도행전 16 : 11-15 에 의하면 사도바오로는 제2


차 전도여행 때 필립비에서 맨 먼저 입교한 사람이 바로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사 리디아라


는 여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당시 티아디라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 했다.


이 비단은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우 고가픔이어서 부호들이나 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680년경의 리디아 인들이 티아디라와 사르티스 윌대에 리디아왕국을 건설


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기원전 190년 베르가모 왕국이 이곳을 통치하기까지 여러 왕국들이 번갈아가


며 이곳을 점령 했다..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입교시킨 사람이 이곳 츨신이고, 특히 옛


조상의 왕국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는 사실과 물욕 때문에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교우들


로부터 어떤 물질적 도움을 거부하던 바오로 일행이 리디아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 묵시록의 7교회


에 보낸 펀지 증 티아디라에 보낸 펀지가 가장 길다 (묵시 2:18-19)는 것은, 많은 것을 묵상케 한다.


시록에서 꾸짖은 거짓 예언녀 이세벨은 티아디라의 예언녀 삼밧뜨라라는 여인을 비유한 것으로 구


약성서에서 ‘음행과 술수’로’ 악명을 떨친 바알신을 섬긴 국가인 시돈의 왕 애드바알의 딸 이세벨을 비


유한 것이다.   이세벨은 아합왕의 왕비가 되어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신을 섬기도록 갖은


술책을 부렸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에 전락했으며, 참 에언자 엘리야와 대적하게 되었다.
 


베르가모(pergamum) - 現 베르가마 (Bergama)


묵시록 2장 12-17절에 나오는 이곳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선사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그의 막료 러시마쿠스 장군이 베르가모 일대를 통치하다가 기원


전 281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러시마쿠스의 부하 를레타리우스가 베르가모


를 수도로 삼아 베르가모왕국을 세웠다.  베르가모는 독립된 왕국 의 중심이 되어 높은 문화를 이루었


다. 기원전 133년 마지막 왕 앗달로스 3세가 죽으면서 왕국을 로마공화국에 헌납하게되고, 베르가모


는 아시아 속주에 편입하게 되었다. 베르가모에 가면 시가지 동북쪽 높은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천년


요새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베르가모 왕궁, 멀리서 식수를 끌어들여 저장한 저수장, (B.C197


- B.C 159)가 지은 큰 도서관이 있고, 가파른 언덕배기에 만들어진 노천극장을 볼 수 있다.


또 이곳 시가지 서쪽 외곽지대에는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117 -138년 재위)때 지은 방대한 종합의료


시설이 있다.   이곳은 B.C 4세기부터 A.D 400년대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할


을 하였다.  로마황제 Caracalla(A.D 211 - 217)도 이곳에 와서 치료를 받았다.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


로 황제는 거의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외외 원헝극장을 세워주었다. 이곳의 치료방법은 약물


요법 이외에 정신요법,  일광욕,  운동요법,  맨발 걷기 요법,  음악요법 등을 사용 했다고 한다.


로마황제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의 신전과 함께 묵시록 2장 13절에서 말하는 ‘사탄의 권좌’로 추


정되는 하드리아누스 신전이 이곳에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 건축물은 밑으로 5elinus강이 흐르도


록 설계되었다. 본래 희랍-이집트 신인 5erapis를 위한 신전이었는데 비잔틴시대에 내벽 을 쌓아 성당


으로 개조하여 사도 요한이 거둔 성과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요한 묵시록과 묵시록의 일곱교회


요한 묵시록은 전체성서 증 마지막 책으로서 요한복음, 요한 1.2.3서와 함께 요한 공동체에서 쓰여진


성서로, 요한계 문헌으로 분류된다. 사도 요한이 집필 했다는 교회 전승에 따라 요한묵시록이라 불리


게 되었지만 요한계 문헌이 전해 내려온 공동체에 속한 서로 다른 저자들이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된


다.   더군다나 요한 묵시록은 문체나 성격이 복음서나 서간들과 는 현저하게 차이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묵시록을 집필을 했다기보다는 바르나바의 동역자인 요한 마르코(사도 15 37 39)나 원로 요한


(2요한 1절) 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요한이라는 사람 내지 사도 요한의 이름을 빌린 익명의 저자가 집


필했을 거라고 보고 있다.


요한 묵시록은 도미티야누스(81-96)횡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며, 집필 배경은 로


마 저제국의 도미티야누스 황제가 스스로 ’신이 요 횡제'라 자처하면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곳곳에 황제 신전을 지어 참배토록 강요하자,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거부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대대적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때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당하기도하고, 순교에 대한 두려


움으로 배교하거나 신앙이 흔들리자, 이런 현상을 주목해온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환시를 바탕


으로, 여|수 그리스도는 고난 받는 어린양임을 일깨움으로써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희


망을 북돋우고자 에페소 일대 아시아 속주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가빠도기아 현지명 - 네브쉐히르(Nevsehir) 성서명 - 가빠도기아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가빠도기아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남동쪽으로


280km 떨어진 네브쉐히르 도시 일대의 광활한 고원지대이다.


이 지역은 원래 사암지대였으나 신생대 3기 화산으로 인하여 화산재가 응회암이라는 암석으로 굳어


졌고, 오랫동안 지각 변동과 풍화작용으로 생겨난 원추형의 현상은 약 800㎦를 이루고 있다... 이곳의


지하 동굴은 기원전 1,200년 전부터 서기 17년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서기 14-37년 재위)가 가빠도기


아 왕국을 멸하고 로마 제국 영토에 편입 할 때까지 수많은 왕국 교체과정에서 전쟁 패잔병들이 소규


모로 토굴을 파고 은신해 살면서 시작 됐다. 그 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심해지자


소아시아 반도를 비롯한 각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대거 몰려와 지하동굴에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


였다.



가빠도기아 그리스도교의 역사
 
가빠도기아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l서|기부터 13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마 박해와 7세기 아랍의 진입, 8세기 전후 동로마 내부 갈등으로 성화의 지지자들이 우상숨배자로


몰려 박해를 받자 이곳으로 도피해 지하 동굴교회를 만들고 성화를 그렸다. 성화가 처음 그려진 것으


로 주정되는 1-2세기의 것은 거의 다 훼손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7-9세기 이후의 것들이다. 동굴교


회는 바위 속 터널을 통해 다른 교회들과 거주지로 연결 되어 있고, 또한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요소마


다 둥근 돌로 만든 문을 두어 외부의 진입이 있을 때 통로를 막았으며, 이웃과 이웃의 통신 수단으로


비둘기를 이용하였다.


가빠도기아 지역은 신약성서에는 2번 나온다(사도 2,9; 1베드 1,1) 서기 30년 5월경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사도가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할 때 가빠도기아에서 순례 온 유대인들이 있


었다 한다(사도 2,9) 그런가 하면 1세기 말엽에 쓰여진 베드로서 서두에서 지금의 터키 여러 지방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를 전하는데, 그 가운데 가빠도기아도 등장한다(1 베드 1 1) 서기 4세기에


그리스도 신학과 영성이 약진한 곳은 콘스탄티노플도 에페소 주변 야시아도 아닌 놀랍게도 터키 중부


의 외진 곳인 가빠도기아 속주였다.  이때 이곳 가빠도기아에는 3명의 교부가 혜성처럼 나타났으니


곧 가빠도기아의 수도 가이사리아(지금의 카이세리)의 주교 바실리우스. 나지 안조의 주교 그레고리


우스 니싸의 주교 그레고리우스이다.
 


바실리우스Basilius Magnus


바실리우스(Ba히lius Magnus 329/331- 379 년)는 수녀원장으로 생을 마감 한 성녀 마크리나가 여동


생이었고, 두 남동생도 주교였다. 그는 가이사리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352년 가빠 도기야로 돌아와서부터 수도생활에 전념 했다.. 그는 철두철미한 삼위일


체 교리 신봉자로 그가 375년에 탈고한 ‘성령론‘ 덕분으로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


령의 신성교리‘가 통과되었다. 한편 그가 저슬한 ’수도규칙서 소본(regulae brevius tractatae)‘과 ’수도


규칙서 대본(regulae fusius tractatae)‘은 동/서방 수도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레고리루스Gregorius Nazianzenus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azianzenus 329/330 -389/390년)는 45년간 나지안조 교우촌의 주교로 재


임한 그레고리우스와 성녀 논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레고리우스는 379 년 황제로 등극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총애를 받아 380년 11월 콘스탄티노플 대


주교로 발탁되어 381년 5월 제 1회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의장으로 취임하여 공의회를 주도 했다.


러나 공의회 일부 교부들이 주교좌 이동을 금지한 니케야공의회 규정을 내세워 그레고리우스의 콘


스탄티노플 대주교직을 문제 삼자, 그는 공의회 중에 그 유명 한 ’고별사(연설 42)’를 하고 나지안조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사상적으로 삼위일체의 교리와 ’마리아는 하느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이라는


존칭을 강력히 옹호 했다.  그는 바실리우스와는 달리 무적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으로 교회행정과 대


인 관계에 매우 서툴러 한평생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고 피해의식에 젖어 지냈다. 그래도 뛰어난 문장


력으로 연설문과 시, 서간문에 두루 능 했다.. 오늘날 ’나지안조’를 잦아가면 미루나무와 밀밭사이에


큰 건물 주춧돌만남아 있다.


 
니짜의 그레고리우스Gregorius Nyssenus


니싸의 그레고리우스(Gregor?us Nyssenus 335/340 -394/395)는 성녀 마크리나와 가이사리아의 대주


교 바실리우스의 동생이다. 그는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참석하여 325년 니케야공의


회와 381년 제1자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획정한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여 ‘성령의 신성 교리’를


확정하는데 크게 기여 했다.. 가빠도기아의 세 주교 중에서 가장 신비주의적 경향을 지녔던 그는 성서


를 우의적으로 해석한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신비주의적으로 풀이하곤 했었다.


예를 들자면 ’모세 의 한평생’에서는 영혼이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과정을 논하고,’아가서 주석서’에


서는 영혼과 하느님의 합일을 논하였다.


 
괴뢰메 계곡


괴뢰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으로 환상적이다. 이곳은 지상 바위 동굴 속에 프레스코와 성화들


이 교회마다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 많이 파괴 되었으나 토카르트 교회 같은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


되어 있다. 어두운 교회 천정과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활과 기적들,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등이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동굴 성당은 바실리우스 성당(작은 성당). 엘말러 킬리서1 (사과 성당). 성녀 바르바라 성당,


열라늘러 킬리서I(뱀성당), 카란르크 킬리세(어두운 성당), 크즐라르 마나스트러(수녀원), 엘나자르 성


당 등이 있다. 괴레메는 그리스 중부의 수도원 집성촌 메테 오라, 아토스와 더불어 가장 인상 깊은 수


도원이 있다.  1923년 터키와 그리스가 몇은 조 약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수도자들은 모두 그리스로


이주 했다.  교회 내부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시는 모습과 예수님


께서 예루샅렘에 입성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가시는 모습, 또한 야기를 앉고 있는 마리아 등이 그려져


있다.  이 성화는 10-13세기에 그린 것들로 지금도 선명하게남아 있다. 또한 십자가를 메고 로마 군인


들에게 끌려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성


모 마리아상 등 의 성화들이 댁과 전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성화들은 대부분 7-9세기 때 그린 것으로 소석회에 모래를 섞어 바르고 채색한 프레스코화로 정교하


게 그려졌다 외부침입과 풍화작용으로 많이 손상된 상태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쿠유와


카이막카르 지하도시의 형태는 비슷하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대형 지하도시는 현재 8층까지 내


려갈 수 있다.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더 큰 공간의 넓이가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게 됐다. 지하도시에는 밖에서 추수한 곡식들뿐만 아니라 사료들을 저장


했고, 비상시 음료수를 위해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포도주를 놓아둔 흔적도 있다.   땅속 깊이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또한 이것을 지하공기를 맑게 해 주는 통풍장치로 이용하였다.


동굴 중간 중간에 외부의 진입을 자단하기 위해 둥근 뱃돌 모양의 큰 석물(右物)도 놓여있다.


2만 여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정도의 이 지하도시는 주거지로 사용하던 방들과 부엌, 교회. 곡물 저장


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저장실, 성찬 및 세례식을 갖던 장소, 신학교, 지하 매장지 등 도시 기능을 완


전히 갖추었다. 이곳의 지하도시는 위기시 타 지하도시로 피신할 수 있는 9km 정도의 지하 터널로 연


결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지하 도시가 이 지역에 36개정도 있다. 이 지하도시에는 성화가 일체 보이


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교 초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주정된다. 가빠도기아에서 많은 수도원이


있는 괴뢰메 다음으로 유명한 장소이다. 미국의 그랜드캐넌을 닮은 험준한 골짜기에 동 굴교회 열 두


개가 있다.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3개의 갓이 있는 바위를 파고 생활한 주상고행자(the stylit)들은 벽에


그들의 존경의 대상이던 시메온의 벽화를 그려 넣음으로서 시메온의 수도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


다.  벽화의 내용은 시메온과 그의 어머니, 용을 치료하고 있는 시메온, 시메온과 밧줄 등이다.


성 시메온 (St. Symeon the stylite 390-459)은 주상고행 생활의 창시자이다.


로마의 박해시절부터 자기희생과 헌신, 순교로만 이어지던 기독교인들에게 갑작스런 콘스탄틴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신앙의 자유는 일시적인 당황을 갖게 했다.


자기희생에 익숙해 있던 이들은 이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스스로의 고행 및 은둔생활에 들어가기 시


작 했다.  그 증 대표적인 인물이 시몬으로서 그는 안티옥(지금으I Antalγa,섬서상의 수리아 (안디옥)


에서 살았다. 스스로의 고행을 위해 좁은 굴속이나 빈 우물 속에 들어가 생활을 해본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산속으로 들어가 스스로의 몸을 바위의 쇠사슬에 묶어 놓고 생활해보나 또 이에 만족


을 느끼지 못하여 이번에는 방랑생활을 시작해 본다.


그에게는 환자, 불구자 혹은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는 이들 사람들을 피해 이번에는 기둥을 생각해 내었다.  즉 수평적 탈출이 어려워지자 이번에는 수


직적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3단의 기둥을 쌓고, 그 꼭대기에 겨우 자신만


이 설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생활 했다.  왕이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찾아오면 사다리를 이용해 올라가


야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기둥꼭대기에서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조언하며 살았다고 한다.
 


파묵깔레 (성서명 : 히에라몰리)


산화칼슘이 주성분인 온천수가 언덕 꼭대기에서 솟아남으로 수 전 년을 두고 흘러내린 온천수는 산비


탈을 온통 순백의 바위로 뒤덮게 했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 욕조를 만들어 놓아 이 세상 다른


곳에서 울 수 없는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또 한쪽의 산자락에서는 유황온천이 흘러 온천수를 이용


한 질병 치료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 했다.. 최조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군주는 페르가


뭄 왕국의 유메네스로서 페르가뭄의 창건자 델레포스(Telephos)의 아내 히에라(H?era)를 기념하기 위


해 이 도시를 히에라폴리스라고 명명했으며 聖市(성시)라는 의미를 갖는다.


기원전 133년에 로마제국에 편입되면서 로마 문명의 옷을 입기 시작 했다.. 그 후 티베리아 횡저 시대


인 AD 17년에 지진에 의해 대파되었으나 복구되어 2-3세기경 최 전성기를 맞이 했다.. 바둑판 모양의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복구된 이 도시는 수많은 각종 신전들이 건립되어 있어서 ”신전의 전시관”이


라 불릴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들의 대부분 이 이 시기에 지어졌다. 히에라폴리스


의 주산업은 카페트 및 직조를 주로 하는 양모 산업과 꽃을 기르는 원예사업이 중심이었고 특히 석공


예가 상당히 활발해서 섬세한 돌 조각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있다. 인근 지역에는 대리석 산지가 있어


서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의 알록달록한 대리석 기둥은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다. 다시 6세기부터 지진


으로 도시가 파괴되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지금의 데니즈리로 이주해 살기 시작 했다..


유적으로는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원형극장으로 2세기 하드리안 황제때 지어진 것으로 1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또한 역사상 중요한 것은 필립보 사도의 순교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


사람인 필립보가 이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사건이 생겼는데 후에 그 무덤 위


에 세운 교회이다. 이 도시의 북쪽 끝에 수 천개의 무덤이 있는 공동묘지가 있는데 소아시아 반도에서


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르소


사도 바오로의 탄생지 다르소는 소아시아(터키) 남동쪽 해안 길리기야 관구에 있는 도시이며, 길리기


야 페디아스의 주요 수도이다. 기원전 323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 대왕의 막


료로서 시리야에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운 셀레우코스 니카토르(5eleukos Nikator)가 다르소 일대를


차지했다. 그래서 다르소는 자연스레 동서 문화와 언어의 교차지가 되었다.(기원전 333년에는 알렉산


더 대왕이 다르소를 관통하는 치드누스강에서 목욕하다가 익사 할 번한 일화도 있다.)


기원전 64년 이 곳은 로마에 합병되어, 기원전 57년에는 길리기야(Cilicia)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으


며 기원전 50년에는 로마의 달변가 키케로(Cicero)가 길리기야 총독으로 이곳에 부임 했다.


기원전 41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장군이 내방해 면세 혜택을 베풀었는데. 이때 이집트 여왕 클


레오파트라가 아름다운 여신 비너스로 분장하고 지드누스강으로 배를 타고 와서 안토니우스 장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바오로는 다르소에서 태어난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고(필립 3 5) 개심


후 삼년이 지난 36년경에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예수님의 아우 야고보를 만나본 다음(갈라 1,17-


19)고향 다르소로 돌아가 약8년 동안 지냈다(사도 9,3) 44년경 그는 시리아와 안티오키아 교회의 일


을 돌보던 바르나바의 초빙을 받아 안티오키아로 가 만 일 년 동안 그곳 교회의 신도들과 함께 설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졌다(사도 11,25-26)


에제2차 전도여행 때(50-52년 경)도 바오로는 고향 다르소를 거쳐 갔음에 틀림없다. 이 여행 경로를


보면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타우루스(Taurus) 산맥을 넘어 제1차 전도지역(비시


디아의 안티오키아, 이고니온, 리스트라, 데르베)을 다시 찾아본 다음, 훨씬 북쪽에 자리 잡은 갈라디


아 지방으로 갔다. 그런데 그 험준한 타우루스 산맥을 넘자면 별 수 없이 다르소를 관통하는 지드누스


(Cydnus,지금의 타르수스 수유)강을 따라 협곡(길리기야 관문)을 지나거나 다르소를 지나 실리프케


(Silifke) 항구에서 칼리카드누스(Calycadnus,지금의 픽수)강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러니 어느 경우에


그의 고향 땅 다르소를 거치게 마련이었다. 제3차 전도여행 때(53 -58 년경)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바오로는 세 차례 전도여행을 마치고 에루살렘 성전에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때 바오로가


로마의 파견대장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혀 ”나는 길리기야의 다르소 출신 유대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


의 시민입니다” 라고 밝혔다(사도 21 39)


다르소는 일찍이 주교좌가 있었는데, 그중 안티오키아 출신 디오도루스 주교(327년 다르소 주교,


394년경 사망)가 가장 돋보인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아니즘, 배교자 율리우스 횡제


(361-363년 재위), 예수의 인성을 소흘이한 아폴리나리우스(시리아의 라오디게이아 주교, 310-390년